동서양의 문화적인 교류가 심화되면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불교의 명상법이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때 불교명상과 심리치료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용어가 바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이다.
일부 불교학자나 심리학자들이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새로운 학문과 관점이 소개가 될 때는 여느 문화체계에서도 반드시 뒤따르는 논의가 번역어의 적절한 선택문제이다. 마인드풀니스의 번역문제는 불교정신과 심리치료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취지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필자는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곧 마음챙김이란 용어가 불교의 근본정신과 심리치료의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왜곡시킬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서구 심리치료자들은 ‘마인드풀니스’란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대부분 불교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마인드풀니스는 ‘사티(sati, 念)’에서 유래된 번역어이다. 하지만 서구의 심리치료자들은 결코 사티(sati, 念)의 의미만을 한정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불교의 명상법을 서구사회에서 선구적으로 심리치료에 적용한 존 카밧-진(John Kabat-Zinn)은 마인드풀니스란 개념을 ‘주의력의 조절’과 불교수행의 ‘팔정도’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법’과 같은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좁은 의미로는 ‘현재의 경험에 대해서 판단 없이, 주의를 집중하는 자각(awareness)’으로 규정한다. 또한 존 듀네(John Dunne)는 최근에 논의된 불교학자와 심리치료 학자들의 워크숍에서 ‘마인드풀니스’의 구성요소로서, 기억과 재생을 의미하는 ‘사티(sati)’, 철저한 앎과 바른 이해를 의미하는 ‘삼빠잔나(sampajanna)’, 방일하지 않음이나 주의 깊음을 의미하는 ‘압빠마다(appamada)’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정의한다.
대체로 서구 심리치료 학자들은 마인드풀니스를 사티보다는 오히려 통찰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거머(Christopher K. Germer) 교수이다. 그는 『Mindfulness and Psychotherapy』(김재성 옮김, 『마음챙김과 심리치료』)에서 마인드풀니스를 ‘순간순간의 자각(awareness)’으로 정의하고, 집중명상(samatha)과 짝을 이루는 통찰명상(vipassan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C.K.Germer, 2005, p.15. p.289).
주지하다시피, 위빠사나란 심리현상을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 것이다. 국내에서 어떤 학자도 위빠사나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챙긴다는 것과 ‘마음이’ 챙긴다는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된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불교의 교설에 의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곧 순간순간 변화하는 까닭에, 챙겨서 가져지닐 수 있는 대상이란 없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불가능하다. 마음‘이’ 챙긴다는 경우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어떤 마음의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 이것은 불변의 어떤 주체를 상정하게 되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설(無我說)에 위배된다.
결국 마음챙김은 정체불명의 수행방법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생멸하는 심리현상을 챙겨서 가져지닐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수행정신이다. 만약 챙겨야할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주어든 목적어로 사용되든지, 허구의 환상을 만들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강박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불교명상의 근본정신은 무엇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챙겨야할 그 무엇도 본래 존재하지 않고, 챙기려는 그것이 환상이고 착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서구 심리치료자들은 불교의 명상법인 마인드풀니스를 임상적인 상황에 적용시킨 것일까? 서구 심리치료학은 충분하게 다양한 이론과 수준 높은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인가?
불교명상을 심리치료에 적용한 서구의 심리치료자들은, 기존의 서구 심리치료 이론들이 대부분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들로, 내담자의 경험을 챙기고 관리하여 통제하려는 방식으로 심리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심리치료자나 환자의 태도는 불안이나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인 증상들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히려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임상적 실험보고서가 학계에 계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불교명상에 기반한 새로운 관점의 심리치료자들은 마음현상들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 지켜보는 동양적인 가치가 효과적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불교명상을 수용한 이유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인드풀니스’이란 명상법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사유방식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면서 대두된, 심리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심리현상을 수용하고 허용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챙김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자기 몫을 챙기고 관리하는 소유양식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사회의 병폐이기도 하다.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결핍감을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허구적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적인 심리기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인드풀니스’를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마인드풀니스 테라피(Mindfulness Therapy)’처럼, 미술치료나 인지치료처럼 학파의 명칭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명상치료’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번역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마인드풀니스를 수행이나 심리치료에서 기술적이고 좁은 의미로서 사용할 경우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본다. 어둠(無明) 속에서 마음현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작하지 않는 채로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본다’는 의미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고, 경험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이것이 불교명상과 동양적 심리치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동방대학원대 교수·한국명상치료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