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 연구로 학위 취득…논문·역주 다수
‘문자 세우지 않는’ 선어록 번역으로 정평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종에서 어느 종파 못지않은 방대한 어록을 남겼다는 점은 얼핏 보기에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립문자가 곧이곧대로 문자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고착화된 언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불립문자엔 문자의 구사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아니라 문자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으로 표현을 확장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어록 번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일정한 원어에만 매달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언어 조건에 가장 적절한 말로 바꿈으로써 원래의 개념을 새로운 표현 형식에 담아 보여주는 작업인 까닭이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인 김영욱(51) 박사. 그는 ‘문자를 세우지 않으면서’ 선어록을 번역하고 있는 드문 학자다.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어록들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생생한 오늘날의 언어로 되살아난다.
지난 2004년 6월 출간된 『진각국사어록 역해』가 그중 대표적으로 단순한 문자의 교체가 아니라 당대 선사들의 선기(禪機) 번뜻이는 문자를 현대인들이 읽고 생생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했다는 평을 받았다. 또 각각 상세한 해설과 하나하나 전거를 밝힌 방대한 양의 주석은 선어록 번역의 모범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명망에 가려있던 혜심(1178~1234) 스님을 간화선의 선구자로 새롭게 자리매김토록 하기에 충분했다. 김 박사가 지난 3년간 매진해 최근 출간을 앞둔 한국불교 전통사상서 시리즈인 『정선 선어록』을 비롯해 『정선 휴정』 『정선 공안집』 등이 한국 선종 연구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어록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구절은 다양한 맥락을 압축하고 있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것은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파일과 같습니다. 이 각개의 구절을 풀어서 여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얕은 식견이나마 해설을 부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김 박사는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와 고려대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같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평소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처음엔 화엄을 공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으로 전환했다.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고 활발한 선사들의 세계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그 과정에서 육조 혜능이란 걸출한 인물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혜능이야말로 후대 선사와 문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번역과 해석의 용광로 속에서 거듭 새롭게 태어난 인물임을 깨달았다.
김 박사는 혜능의 사상에 심취했고, 석·박사 학위논문 모두『단경(壇經)』 연구로 받았다. 그러면서 『단경』은 이론과 문자를 추구하며 자신의 관념에 묻혀 있거나 좌선에 몰두하는 사람들 대신 일하는 혜능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돈오에 관한 이야기를 이념화한 선사상의 보고임을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1994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 박사는 곧바로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원을 지탱하는 한 축으로 『가산불교대사림』 원고 집필에 동참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선학의 세계로 이끌고 있기도 하다.
“김영욱 박사는 십수 년을 한결같이 불교대사림편찬도량에서 정진해온 내심 자랑스러운 항심(恒心)의 연구자다. 더구나 공부 없는 지식인의 초상이 현란한 가운데 자족(自足)으로 중심을 잡고 묵묵히 공부하니 고맙고 기꺼울 따름이다.”(가산불교문화연구원장 지관 스님) “선어록 연구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이다. 뜬 구름 잡는 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전거를 찾아 그것을 풀이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또 원만하고 융통성 있지만 옳고 그름에 있어서는 냉정하리만치 물러서지 않는 단호한 성격도 학자들이 본받을 점이다.”(은정희 전 서울교육대 교수) “원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뛰어나며, 학문적으로 굉장히 신중하고 사려 깊다.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김 박사의 탁월함은 단지 선어록 역주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조사선의 언어형식」, 「간화선 참구의 실제」, 「선수행론을 통해 본 지성의 정체」, 「『본지풍광』 역주-그 틀과 방향에 대한 시론」, 「한국 간화선의 개화」 등은 오랜 역주로 다진 김 박사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나는 역작들이다. 특히 성철 스님 사상의 핵심으로 일컬어지는 『본지풍광』에 대한 논문은 첫 시도이기도 했지만 돈점논쟁에 국한된 성철 스님에 대한 논의를 선사상 전반으로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 「오늘의 동양사상」에 실린 ‘조사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비롯한 몇 편의 서평들은 웬만한 논문 못지않게 서평을 통해서도 심오하고 탁월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로 일컬어진다.
칼을 쓰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무인이 됐을 것이라는 김 박사. 그래서일까. 그에게선 때때로 법 앞에 칼날 같이 단호했던 옛 선사들의 면모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불교계와 불교학계에 대한 그의 서슬 퍼런 비판들도 그 중의 하나다. 고만고만한 교양과 말솜씨를 앞세워 제멋대로 화두를 희롱하거나 적당한 통찰력과 지식에 흡족해하는 이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화두를 만나다』) 불교라는 껍데기를 썼을 뿐 빈약하고 족보 없는 사고만 나열하면서도 사통팔달한 듯이 꾸미는 일부 응용불교 논문에 대해 매섭게 질타한다.(「응용불교,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 요컨대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말하기를 그는 두려워 않는 것이다.
지난 15년 전 연구소에 첫 발을 내디딘 뒤 지금까지 단 하루로 결근 않고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하는 지독한 성실함. 간혹 술자리가 있더라도 평일이건 주말이건 매일 새벽 2시까지 연구하는 악착스런 의지. 여기에 매일 부딪히는 난해한 어록의 구절들과 씨름하며 지새우는 숱한 날들까지…. 선이 꼭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자신의 또렷또렷한 의식의 중심을 움켜쥐고 선어록이라는 은산철벽과 늘 마주하는 김 박사는 이미 눈 푸른 수행자다.
■김영욱 박사와의 Q&A
질문 |
답변 |
이유 |
존경하는 인물 |
6조 혜능
조주선사 |
진실한 일상의 성자
간결하고 적확한 선어 구사 경지 |
꼭 읽혔으면 하는
저술이나 논문 |
화두를 만나다 |
화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
꼭 하고 싶은 일 |
가산대사림 완간까지 원고 집필
선문염송 전편 역주 |
기왕에 시작한 일이라
선 정보의 총화 |
선 이외 관심분야 |
원시불교 |
선법의 원천 |
늘 새기는 구절 |
없음 |
때마다 다르다 |
가까운 학문적 도반 |
전·현 가산 연구원들 |
가장 근접한 대화 상대 |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1033호 [2010년 01월 25일 1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