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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프라 바르톨로메오作. 십자가에서 내림. 피렌체 피티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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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예수님의 출생, 성장, 시험,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치심,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을 성경에 포함된 4복음서 기록에 기초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4복음서에 나온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말해주는 복음서가 지금 4복음에 포함되지 않은 복음서들에도 나타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에 대한 글을 마치기 전에 여기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 시각,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리고 4복음 이외의 복음이란 무엇이고 거기서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비판적 성경 읽기는 비극
성경을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세를 ‘근본주의적 태도’라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는 사실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문자주의를 넘어서서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각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는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성경이나 기타 경전, 그리고 의식(儀式)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읽을 때 표피적 문자를 넘어서서 여러 가지 시각, 여러 가지 차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문자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를 억누르게 되고 이에 따라 그 이후 1천6백년간 그리스도교에서는 문자적 성경 읽기가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서양에서는 종래까지의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가 많은 이들에게 ‘반지성적, 문자주의적, 독선적, 스스로 의로운 척, 우익 정치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된’ 종교집단으로 여겨지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는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만이 유일한 선택일까?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를 버리는 것이라는 공식을 거부하고 제3의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택이 바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the newly emerging Christianity)와 함께 하는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예수님 말씀의 표피적, 문자적 차원의 뜻을 넘어서는 심층적, 영적 차원의 뜻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예로 예수님의 핵심적인 기별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고 하는 말씀을 심층적으로 풀이하면 어떻게 되는가 알아보기로 한다.
하느님 나라는 내게 임한 神性
우선 이 문장에서 이 ‘회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하면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의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 ‘눈을 뜨라’, ‘깨치라’는 뜻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그러니까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혹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하는 말로 풀 수도 있다.
‘천국’이라고 하면 저 하늘 어디에 떠있을 지리적, 물질적 나라로 생각되기 쉽지만, ‘나라’ 혹은 ‘왕국’의 본래 말인 말쿠스(히브리어)나 바실레이아(그리스어)에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는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영어로도 the Kingdom of God보다는 Sovereignty of God, Reign of God, Rule of God, Principle of God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 있다고 하는가? 표피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하느님나라, 혹은 천국은 하늘 어디에 붕 떠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믿어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나 ‘하느님 나라’의 더욱 깊은 뜻을 알아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선 예수님 스스로도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다. 이런 뜻에서 이 하느님 나라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원리,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 틀릴 것이 없다. 영어로 ‘God within’이다. 바울 같은 이는 이를 ‘내속의 그리스도(the Christ within)’라 했다.
천국 복음, 참나 찾으라는 뜻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가까이 왔음’을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그의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등 ‘언제’의 문제로 논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난다.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닿는 지근(至近) 거리에, 내 속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했다. ‘먼저’라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당연히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일부분, 내 속에 들어있는 신적 요소, 내 속에 임해 계시는 하느님 자신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 나의 바탕, 나의 근원이란 뜻에서 그 하느님은 결국 나의 ‘참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나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제나’가 아니라 나의 참된 나, ‘얼나’를 찾는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 하느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이라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佛性)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성 사상보다 좀 더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gatagarbha)’ 사상이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 embryo)’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함께 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 복음’도 결국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여 내 속의 참 나,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말이라 보아 지나칠 것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이나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말에서 그 ‘나’라는 것도 결국 역사적 고타마나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우리의 바탕이 되는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마복음 가르침 선불교와 비슷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땅 밑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묻혀 있던 52종의 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성경 4복음에 속하지 않은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도마복음」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철두철미 우리 보고 우리 속에 있는 천국, 참 나를 발견하는 ‘깨침(gnosis)’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분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가르침, 곧 밀의적(密意的, esoteric)가르침을 가르치고 있고, 그의 이런 가르침은 여러 면에서 선불교의 가르침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지난 천6백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셈이다. 그리스도인 중 이런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이런 면에서 불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하고 협력은 더욱 긴밀하고 건설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필자의 도마복음 풀이가 현재 「기독교사상」 1월호부터 연재되고 있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39호 [2008년 03월 03일 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