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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도교의 창시자 노자(老子)

slowdream 2010. 4. 26. 00:32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도교의 창시자 노자(老子)
“선입견 버리고 道와 하나될 때 속박 벗어나” 설파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24일 13:58 월요일]
 

‘도덕경’의 저자… 한·중·일 삼국문화에 커다란 영향
18세기 서양에 알려져… 환경·여성 문제로 새롭게 주목

 

노자를 흔히 도교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사실 ‘도교’(道敎, Taoism)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따져서 두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는 도가(道家)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도교(道敎) 신앙이다. 도가 사상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와 초월을 추구하고, 도교 신앙은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이 육체적으로 장생불로(長生不老)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도가 사상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이기 때문에 한(漢) 대 말에 와서는 ‘노장사상’이라 한데 묶여 불리기도 했다. 도교 신앙은 노자의 이름을 걸고 2세기 동한(東漢) 사람 장도릉(張道陵)이 세운 종교 집단을 일컫는다.

 

노자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임신, 임신한 후 82년이 지나 태어났다는 것이다. 뱃속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기에 아기의 머리는 이미 늙은이처럼 하얗게 되어 태어났고, 이 때문에 노자, 곧 ‘늙은 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노자라는 말은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는 뜻의 존칭이기도 하다.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노자가 누구였을까 하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을 제시하고, 결국 주(周) 나라에서 도서를 관장하던 이이(李耳)라고 하였다.

 

『사기』에 노자가 나이가 들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서쪽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이 기록에 따라 그가 인도로 갔으리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아무튼 『사기』의 이야기에 의하면,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函谷關)이라는 재를 넘게 되었다. 재를 지키던 윤희(尹喜)라는 사람은 전 날 밤 꿈에 한 성인이 물소를 타고 재로 오는 것을 보았는데, 노자가 오는 것을 보고 분명 꿈에 점지된 성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 세상을 등지려 하느냐고 말렸지만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러면 후세를 위해 글이나 좀 남기고 가시라고 간청했다. 노자는 이 간청에 따라 3일간 머물면서 간단한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경』 ‘5000자’라는 것이다.

 

물론 현대 학자들은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글의 성격이나 구성, 나타난 사상 등으로 보아 어느 한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서 쓴 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노자의 『도덕경』이 『장자』보다 오히려 더 늦게 나타났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문헌사적 문제가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동아시아 사상사에 끼친 영향력, 그리고 그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깊고 아름다운 사상이다.

 

1940년대 동양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한 임어당(林語堂, 중국발음 린유탕)은 “전체 동양 문헌 가운데 어느 책보다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이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중국 문명이나 중국인들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은 중국, 한국, 일본 동양 삼국인들의 심저를 움직여왔고, 또 종교, 철학, 예술, 정치의 밑바닥을 이루었다.

 

사실 『도덕경』은 근래 서양 사람들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나온 영어 번역만 해도 100종이 훨씬 넘을 것이다. 서양에서 1788년 라틴말로 번역된 이후 여러 말로 번역된 것을 헤겔, 하이데거, 톨스토이 등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읽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서양 대학에서도 도가 사상에 매료되는 학생들이 많을 뿐 아니라, 환경문제나 여성문제 등에 관련된 사람들도 『도덕경』에 나타난 세계관이나 자연관, 여성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도덕경』은 ‘도덕’이라는 글자 때문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식의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도와 덕에 관한 경’이다. 그러면 ‘도’는 무엇이고 ‘덕’은 무엇인가?

 

『도덕경』 제1장 첫 문장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했다. 도는 정의되거나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교식 용어로 하면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언설을 이(離)하는’ 경지이다. 그러나 영어로 “The Way things are” 할 때 그 ‘The Way’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그러하도록 하는 근원 혹은 기본 원리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제1장은 그것이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이라는 말로 끝낸다.

 

물론 『도덕경』 여기저기에는 도에 대한 언급이 거듭된다. 예를 들어, 제25장에 보면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습니다.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습니다.”고 했다.

 

또 제42장에 보면,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습니다.”고도 했다. 이럴 경우 도는 만물의 근원, 존재의 근거라는 뜻이다. 『도덕경』의 용어를 따르면 모든 ‘유’(有)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무’(無)라고 밖에 할 수 없고, 요즘 말로 고치면 보통 ‘존재’(being)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비존재’(non-being)라고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쓰는 보통 말로 하면 ‘궁극 실재’(ultimate reality)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의 본질에 관한 추상적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제56장에 언명한 대로 도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대신 그 작용을 살피고 거기에 맞추어 살면서 ‘덕’(德)을 보라고 가르친다. ‘덕’은 이런 의미에서 ‘힘’이다. 또 ‘덕’은 ‘득’(得)과 같은 뜻으로서 도와 더불어 살면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덕경』에서는 도가 이렇게 저렇게 작용하니까 우리도 그 원리에 맞추어 사는 것이 득이라고 말해준다. 인간에 있어서 이상적인 삶이란 결국 도에 맞추어,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흐르고,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도의 작용이나 원리를 체득하고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원리 몇 가지만 예로 든다.

 

1) 도는 ‘되돌아 감’(反, 還, 復). 제40장에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고 했다. 만물을 보라. 달도 차면 기울고, 밀물도 어느 때 썰물이 되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사도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니 삶의 오르막길 내리막길에서 느긋한 마음, 의연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2) 도는 ‘함이 없음’(無爲). ‘함이 없다’고 하여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은은하여 보통의 ‘함’과 너무도 다른 ‘함,’ 그래서 ‘함’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함’이다. 도가 이렇게 ‘함이 아닌 함’(無爲之爲)의 원리이므로 우리 인간들도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3) 도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樸). 도가 아무런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인 것처럼 우리도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제19장), ‘완전한 비움에 이르고 참된 고요를 지키는 것“(致虛極 守靜篤, 제16장)이 덕을 보는 삶, 득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비례해서 증대하는 것 같지만, 욕망을 충족시켜 봐야 욕망이 더 커질 뿐, 오히려 욕망 자체를 줄이는 것이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4) 도는 ‘하루하루 없앰’(日損). 어떻게 도의 길을 갈 수 있는가? 『도덕경』에 의하면,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48장)고 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지식을 버리면 도와 하나 됨의 경지에 이르고, 이렇게 될 때 모든 인위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한다.

 

『도덕경』은 도의 상징으로 물, 여인-여인 중에서도 어머니, 통나무, 계곡, 갓난아기 등을 들고, 이들이 도의 그러함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물은 구태여 무슨 일을 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모든 것의 필요에 응하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겠다거나 하는 과시적이고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부드러움’을 가지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것도 도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한 예수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점이 흥미롭다. 『도덕경』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였지만, 그 가르침의 보편성과 깊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참고: 여기 나오는 『도덕경』 번역은 필자가 풀이한 『도덕경』(현암사, 1995)에서 인용했다. 원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해설은 그 책을 참조할 수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42호 [2008년 03월 24일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