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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공자(孔子)

slowdream 2010. 4. 26. 00:46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공자(孔子)
참 사람의 길 가르친 동아시아 최고의 賢者
기사등록일 [2008년 04월 21일 17:54 월요일]
 

옛 가르침을 창조적 계승, 유교 창시
논어, 도덕경과 함께 성전으로 추앙
神과 來世 대신 ‘현재에 충실’ 강조

 

유교는 일반적으로 공자(孔子, 551~479년 BC)가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유교 전통은 공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공자 자신도 겸손하게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고 했다. 요(堯)와 순(舜) 임금들로부터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을 통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전수하는 사람일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 공자는 ‘창조적 전수자(creative transmitter)’였다.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공자’를 영어로 Confucius라고 하는데,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다. 이 이름을 따서 서양에서는 유교를 ‘Confucianism’이라고 한다. 초대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사상가의 이름을 모두 라틴어식으로 옮겼는데, 그 후 모두 중국 발음으로 다시 바꾸었지만 공자와 맹자(Mencius)만은 라틴어식의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공자의 본래 이름은 구(丘)이다. ‘구’는 언덕이라는 뜻인데, 이마가 언덕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자’라는 이름에 들어간 ‘자(子)’는 공자, 노자, 맹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공자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논어』에 보면 “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일어서고,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 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 칠십에 내가 하고 싶은 바를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의 삶을 집약하는 말인 셈이다. 한대(漢代)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史記)』 47장과 기타 문헌에 따르면 공자는 춘추전국 시대 노(魯)나라, 지금의 산동(山東)성 곡부(曲阜, 중국 발음은 ‘취푸’)에서 태어났다. 세 살쯤에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아들을 가난한 중에 홀로 키웠다. 19세 때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둘을 얻었다. 딸은 공자보다 먼저 죽고, 아들은 대를 이어 지금 77대가 대만에 산다고 한다. 공자의 직계 손녀 중 하나가 2007년 유대인계 미국 영화감독과 결혼해서 공자도 서양 사위를 얻은 것인가 화제가 되었다. 현재 공자의 후손이 200여만 명 되는데, 한국에도 3만4천 명 정도 산다고 한다.

 

공자는 19세쯤 관리로 일했는데, 23세에 어머니가 죽어 3년 동안 곡을 하느라 관리직에서 물러났다. 26세쯤 다시 공직을 잡았지만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선생님으로 일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일설에 따르면 37세에 당시 주(周)나라 수도에 가서 주나라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거기서 도서를 관장하던 노자(老子)를 만났는데, 노자가 공자를 보고 “그대의 건방진 태도와 욕망을 버리고, 겉치레와 감각적 취미를 멀리하시오.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오.”라 하였다. 공자는 밖으로 나와 제자들에게 “새는 날다가 화살을 맞고, 고기는 헤엄치다 낚시에 걸리고, 짐승은 달리다가 덫에 걸리지만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얼마나 위대한 용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노자의 꾸지람을 듣고도 그를 용으로 본 공자의 대인다운 풍모(風貌)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50세쯤에는 노나라에서 지금의 법무장관이나 수상 비슷한 벼슬에 올라 2~3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임금이 이웃 나라에서 보낸 미인계에 넘어가 공자의 간언을 듣지 않고 정사를 게을리 하므로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생각을 펴다가 68세쯤 다시 노나라로 와서 가르치는 일과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72세에 죽어 고향 땅 곡부의 공림(孔林)에 묻혔다. 필자가 1983년에 방문했을 때 무덤에 잔디가 벗겨져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잘 손질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고대 성현의 전기(傳記)가 거의 그렇듯, 철저한 역사학적·과학적 고증을 거친 ‘사실(史實)’이라 믿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중국 산동성 취푸에 있는 공자의 묘.

공자의 사후 그의 말, 그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 제자들의 말을 모아서 엮은 책이 『논어(論語)』이다. 공자와 제자들의 사상을 가장 잘 말해 주는 자료로서, 동아시아에서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기본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몇 가지만 택해서 살펴본다.

 

첫째가 ‘정명(正名)’ 사상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중앙 집권 세력이 약해지면서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던 이른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사람이다. 공자뿐 아니라 당시 의식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처럼 혼란한 사회 질서를 바로 잡을 방법을 생각했고, 또 제각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들고 나왔다. 공자도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한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공자가 들고 나온 해결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정명’이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르게 함’을 뜻한다. 당시 사회·정치적 혼란은 군주가 군주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아들이 아들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임금이 되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이름에 걸맞도록 바르게 행동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임금은 임금이 되고, 신하는 신하가 되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고, 아들은 아들이 되라(君君 臣臣 父父 子子).”고 했다.

 

인(仁)은 『논어』에서 가장 많이(105번) 나오는 글자이다. 우리말로 ‘어질’ 인이라고 하므로 ‘어짊’이라 번역해야겠지만, ‘어짊’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어지러움’은 아닐 것이고 그 뜻이 명백하지 않다. 영어로도 ‘human heartedness, benevolence, goodness, love, humanity’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한다. 한문으로 보면, 人과 二를 더한 것이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있어야 할 도덕적 특성’, 혹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마음’이라 풀이할 수도 있다. 아무튼 사람에게 ‘인’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사람답게 해 주는 요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됨’이라 번역할 수 없을까?

 

‘인’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제자가 공자에게 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공자의 대답이 달랐다. 인을 ‘직(直)’과 ‘예(禮)’로 설명하는 경우를 보자. 인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솔직함(直)’이고 다른 하나는 ‘예의바름(禮)’이다. 솔직함이란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거짓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더라도 남에게 무례하거나 실례가 되어서는 안 되므로 예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예만 떠받들어서도 곤란하다. 솔직함이 지나치면 조야[野]하고 예가 지나치면 좀생이[史]처럼 되므로 둘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솔직함이 지나친 사람에게는 예가 인이라고 할 것이고, 예가 지나친 사람은 솔직함이 인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인이란 그때그때 정황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의(義)’는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이다. 소인배는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지는데, 군자(君子)는 그것이 “옳은 일인가?” 물어 보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이익이 될지 말지 결과와 상관없이 그대로 추진한다. 이것이 바로 ‘의’를 추구하는 태도이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했고, 공자 자신도 옳은 일이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의에 대한 이런 태도는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년)의 ‘단언명령(斷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개념을 연상케 한다. 칸트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와 같이 결과를 가정한 명령을 ‘가언명령(假言命令, hypothetical imperative)’이라 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결과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을 ‘단언명령’이라고 했다.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처럼 보편적 원칙에 따르는 절대적인 명령을 말한다. 공자도 칸트도 어느 의미에서 “Do for nothing.(뭘 바라고 하지 말라.)”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이나 의가 구체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날 때 충(忠)과 서(恕)가 된다. 충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에 반해 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 곧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것이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 이른바 황금률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하늘[天]’이라든가 ‘귀신(鬼神)’ 같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언급을 『논어』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공자의 기본 태도는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이야기하겠는가?(未能事人 焉能事鬼)” “이 생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未知生 焉知死])?”와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태도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먼저 ‘지금 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실존주의에서 주장하듯,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우선한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까. ‘지금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공자의 참된 가르침을 오늘에 맞게 되살리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일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처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공자’를 ‘공자님’으로 하려 했는데, ‘자(子)’라는 것이 이미 극존칭을 의미하므로 여기서는 ‘님’을 빼기로 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츨처 법보신문 946호 [2008년 04월 21일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