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시방의 부처님께서는 모두 하나의 길로서 열반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한 가지의 길입니까?” 건봉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공중에 한 획을 긋고는 대답하였다. “모두가 이 안에 있다.” 나중에 그 승려는 운문화상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운문화상은 부채를 집어 들고 대답하였다. “이 부채가 도약을 하면 33천 제석천의 콧구멍을 꿰뚫고 동해에 있는 잉어를 한 방 치면 그릇에 담긴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비가 온다.”
여기서 “시방세계 부처님께서 모두 하나의 길로서 열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문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의 문이다. 그러면 이 하나의 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이 질문의 요점이다.
이런 질문은 경전에서도 자주 언급된 부분이다. 이를테면 남방 수행의 대표적인 소의경전인 『염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구여,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바로 사념처이다. 이 길은 슬픔과 한탄을 정화하고, 고통과 불만족을 소멸시켜서, 참다운 진리를 실현하고 열반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길’이란 ‘ekāyano maggo’의 번역어이다. 사념처란 신수심법(身受心法) 4가지의 대상에 대한 ‘사티(sati)’를 말한다. ‘사티’는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은 호흡이나 느낌, 마음과 마음의 생멸에 대해서 존재하는 그대로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그대로 알아서 그것들을 통해서 정신을 차린다는 의미이다. 슬픔과 한탄과 같은 느낌에 휩쓸리거나 강박적으로 이들의 느낌을 억압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 채로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위의 문답에서 등장하는 일로열반문(一路涅槃門)이란 용어는 『수능엄경』에서 발견된다. 하나는 제5장 게송의 끝에서 ‘此阿毘達磨 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이란 구절이 보인다. 그리고 제6장에는 ‘此是微塵佛 一路涅槃門’이란 용어가 보인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한길의 열반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듣는 소리를 돌이켜서 듣는 반문(反聞)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는 반문이란 듣는 성품을 다시 듣는다는 의미이다. 듣는 그 자체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키고 그 분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거나 행복해 한다. 이것은 휩쓸림이고 혹은 억압이다. 그러나 여기서 듣는 행위 자체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휩쓸림이나 억압이 없다. 이것을 원만하게 통함[圓通]이라고 한다. 이것은 차별이 없는 평등함이고, 혼란이 없는 텅 비어있음이고, 환하게 밝게 깨어있음이다.
이것이 모든 부처가 걸어가는 열반의 길이다. 과거의 부처도 그러했고, 현재의 부처도 그러하고, 미래의 부처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한 가지 열반의 길이다. 이 길은 막힘이 없다. 주장자로 허공을 그어대지만, 걸림이 없다. 부채로 잉어를 치면, 비가 내린다. 원통하여 걸림이 없다. 앞이 탁 트여서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부터 모든 곳이 장애가 되어 앞이 꽉 막힌다. 바늘구멍도 들어갈 틈이 없다.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그 행위의 자리를 다시 비추어본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 장애가 있는가? 그곳은 낙엽이 떨어지는 탁 트인 가을 산길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9호 [2010년 10월 26일 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