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화상이 몸이 불편하자, 원주가 문안하여 물었다.
“요즈음 몸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마조 스님이 대답하였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우리는 문병을 할 때, 대체로 “몸이 어떤지?”를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몸의 증상을 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조화상은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대답한다. 이 앞에서 어떤 사량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이 자체로 옳은 것이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말한다면 참 부질없는 짓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말하면 더욱 어긋나고, 더욱 치사한 짓이다.
일면불, 월면불.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어떤 해설을 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참 공허하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고, 메아리 없는 헛소리가 된다. 허공의 꽃처럼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의 얼굴과 같은 부처님, 달의 얼굴과 같은 부처님. 이 자체로 그냥 듣고 그냥 그대로 느끼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의미로 해석하지는 말자.
유마거사는 병문안 온 문수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환영의 말을 한다. “문수보살이여. 잘 오셨습니다. 보살은 온다는 모양이 없이 오고, 저는 본다는 모양이 없이 봅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대답한다. “거사님이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온다는 것은 온 것이 아니며, 간다고 하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온다는 판단은 언어적인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온다와 간다는 같은 짝이다. 그들은 개념이다. 온다와 간다는 그 사실로서, 계속적으로 흐름의 과정이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단지 언어적인 표현이 ‘온다’, 혹은 ‘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는 ‘자’는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다고 해도 잘못된 표현이고, 간다고 해도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 온다도 간다도 아니면 이것들의 중도는 무엇일까?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이 있기에 자신이 아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병이고, 무엇이 병에 걸린 것이고, 무엇이 병에서 나은 것인가? 본래부터 병에 걸린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집착으로 말미암아 병이 존재하게 된다. 집착이 바로 중생의 병이다. 그러나 집착의 대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기에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병’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다.
병이 있다면, 존재에 관한 상견에 떨어진다. 이런 경우는 병이 나을 수가 없다. 왜냐면 병은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병이 없다면, 단견에 떨어진다. 왜냐면 병은 실체하지 않지만 현상으로서 고통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몸에서 느끼는 경험적인 사실로서 우리는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병이 있음과 병이 없음의 이분법적인 견해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최고의 진리에 들 수가 있을까? 어떻게 중도가 되는가? 물론 이것은 언어적인 희론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할까?
마조화상은 원주가 “몸이 좀 어떠합니까?” 말하자,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대답한다. 참 적절하다. 어떠한 사량분별도 이곳에서 제거된다. 그러면 사량분별이 제거된 이곳은 어떠한가? 유마거사는 끝내 침묵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전히 외형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 침묵의 내용은 무엇일까? 실질적인 경험내용은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을 날 앞산이 꽃보다 붉게 타오른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1071호 [2010년 11월 08일 1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