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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80. 운문의 자기

slowdream 2010. 11. 24. 17:08

[선문답 산책]80. 운문의 자기
대상과 인식은 병과 약처럼 서로 ‘짝’
대상 없어지면 인식도 저절로 사라져
기사등록일 [2010년 11월 22일 17:22 월요일]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약과 병이 서로 딱딱 맞으니, 온 대지가 약이다. 어느 것이 자기인가?”

 


 

여기서 말한 약과 병은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비유이다. 병이 있은 곳에 약이 있다. 의사는 먼저 증상을 파악하고, 그런 다음에 적절한 약을 처방한다. 있음에 집착하면 없음을 말하고, 없음에 집착하면 있음을 말한다.

 

병과 약은 서로 짝을 이룬다. 그래서 원오극근 화상은 ‘온 대지가 약이다. 자기 자신도 약이다. 이러할 때 무엇을 자기라고 할 것인가?’ 라고 다시 묻는다. 병과 약이 서로 짝을 이루는데, 이때 하나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볏단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다. 그런데 한쪽의 볏단이 없어지면 다른 쪽은 그대로 무너진다. 온 대지가 약이다. 자기 자신까지도 약이다. 그러면 병은 어떻게 되는가? 병은 없다. 일체가 약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자기인가?

 

대상과 인식이 서로 짝을 이루고,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짝을 이룬다. 그런데 대상이 없어지고 왼손이 없어지면, 인식과 오른손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때 어느 것이 자기인가? 대상이 없어지면, 인식도 없다. 왼손이 짝을 이루지 않으니 오른손이 헛손질한다. 그러면 무엇을 자기라고 할 것인가?

 

덕산화상은 방망이를 마구 쳤고, 임제화상은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데 방망이를 쳐야할 대상이 없고 소리를 질러야할 짝이 없다. 그들은 허공을 향하여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소리를 질러대는 꼴이다. 허공에 향하여 혼자서 괜히 수고한 것이다. 차라리 혼자서 달밤에 춤을 추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 것처럼 소란만 만들었다.

 

금아 장로와 설두화상과 이 문제로 밤새도록 토론을 했다. 아침에 설두화상은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약과 병이 서로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만 겹의 관문에 전혀 단서가 없다. 오늘 금아 장로가 찾아와 하룻밤을 지새우며 학문의 바다가 말라버렸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거참, 본래 자기마저 없는 곳에는 학문을 이룰 수가 없다. 학문은 단서에서 출발한다. 단서마저 없는 곳에는 새싹이 돋아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학문이 스스로의 한계를 온전히 드러낸 자리에서는 비로소 전혀 새로운 모습의 새싹이 돋아난다.


금아 장로의 게송에 설두화상은 이렇게 송하였다.

“온 대지가 약인데,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크게 잘못을 하는지.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지 말라. 큰 길은 원래 드넓다. 위험, 위험. 콧대를 하늘 높이 세웠지만 역시 뚫리고 말았다.”

 

존재하는 그대로 옳다. 설사 그것이 죽음이고, 불안이며, 강박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옳다. 그것으로 충분히 약이다. 별도의 약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서 무너져 내린다. 이곳에서 어찌할지를 몰라 힘들어 하고, 아파하며 다시 약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약은 부작용이 많아서 다시 새로운 병을 낳게 된다. 그러니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든 꼴에 다름없다.

 

하늘 높이 길은 이미 뚫려있다. 그런데 문을 닫고서 다시 수레를 만든다. 그 수레는 어디로 갈까? 주인이 없으니 갈 곳이 없다.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야 수레는 수레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주인이 없다. 누구를 자기라고 할 것인가? 주인이 없는 수레에는 가을날 낙엽으로 가득하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73호 [2010년 11월 22일 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