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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산책> 81. 물로 인하여 깨닫다.

slowdream 2010. 12. 9. 16:51
81. 물로 인하여 깨닫다
 
불교는 선입견 넘어선 수승한 체험 강조
온갖 혼란과 미혹에서 벗어날 때에 가능
출처 법보신문 2010.12.02 10:25 입력 발행호수 : 1074 호 / 발행일 : 2010년 12월 1일

옛날에 보살이 있었는데, 욕실에서 홀연히 물의 인연(水因)을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묘한 감촉 뚜렷이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름지기 종횡으로 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처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25원통 가운데 수인삼매(水因三昧)를 말한다. 물로 말미암아서 삼매를 이루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물속에 들어가면 따뜻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싼다. 그 따뜻한 느낌에 몸을 맡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몸의 때를 씻는다. 이때 무엇을 씻는가? 몸을 씻는가? 아니면 몸의 때를 씻는가? 이점은 마치 ‘육조단경’에서 깃발의 문답과 같다. 어떤 승려들이 깃발의 흔들림에 대해서 논쟁을 했다. 어떤 사람은 깃발이 흔들린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바람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그러자 혜능은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흔들린다’는 개념은 어떤 대상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깃발이 흔들린다는 것은 바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호 인과관계가 있다. 바람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깃발이 흔들린다. 바람이 원인이고 그 결과가 깃발의 흔들림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런 인과의 법칙을 보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면 목욕탕에서 때를 씻을 때, 무엇을 씻는가? 몸인가 아니면 때인가? 만약에 이것도 깃발의 비유를 적용하여 보면, 몸과 때는 관습적인 진리이다. 사회적인 언어적인 개념이다. 만약에 이런 언어적인 개념, 관습적인 규칙을 내려놓고, 사물을 직접적으로 그 자체를 경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존재,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삼매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말한다.


과연, 이런 경험이 존재할까?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선입견이나 문화적인 선 이해가 있지 않는가? 이미 그것을 지각하는 자체가 벌써 문화적인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순수한 사물 자체를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반론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의 지각이란 이미 문화적인 의미체계에 의해서 물들어진 상태라는 점을 강조한 주장이다.


하지만 수순한 체험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 불교 전통의 관점이다. 이것은 마음이 혼란과 미혹에서 벗어날 때, 충분하게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혼란에서 벗어남은 마음이 고요한 선정에 든 삼매를 말하고, 반면에 미혹에서 벗어남은 어떤 견해에 대해서도 자유로이 깨어있는 지혜의 상태를 말한다. 선정과 지혜라는 양 측면이 존재한다면, 이들이 충분하게 정화가 되어 있다면, 순수체험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구슬이 본래 맑고 청정하지만, 이것이 다른 색깔로 물들면 그 물들어진 색깔로 보인다. 그러나 구슬 자체는 결코 물들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은 이 구슬은 항상 물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물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전통이 이미 그 마음속에 깊게 자리를 잡고 있기에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옛 조사 스님들은 구슬 자체는 물들지 않는 순수체험이고, 이것은 깨달음으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인식과 대상에 대한 집착과 물들어짐에서 벗어나면 수순한 체험으로서 삼매와 깨달음은 매우 쉽게 경험할 수가 있다. 꽃을 보거나 새소리를 듣거나 물속에 들어가서 그 느낌을 느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삼매와 깨어있음을 충분하게 경험할 수가 있다. 이 경험은 매우 선명하게 경험된다. 여기서 선명은 바로 정혜의 다른 이름이다. 선(宣)이란 밝게 나타남의 선정이요, 명(明)이란 분명한 앎을 말하는 지혜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