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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82. 운문의 보물

slowdream 2010. 12. 9. 17:07
82. 운문의 보물
 
오온은 개념으로 자기 이해하는 방식
인연과 연기가 우리의 근본적인 본성
 
출처 법보신문 2010.12.07 13:49 입력 발행호수 : 1075 호 / 발행일 : 2010년 12월 8일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법을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에 그 가운데 보물이 하나가 있는데,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을 향하고,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다.”

 


 

하늘과 땅 사이에 보물이 있는데 그것이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 보물은 무엇이고 형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승조법사는 ‘보장록’에서, ‘무엇 때문에 무량한 보배가 음계(陰界)에 숨겨져 있을까?’라고 했다. 그래서 원오극근의 ‘벽암록’에 따르면, 위에서 보물은 바로 불성을 의미하고, 형산이란 바로 음계로서 곧 오온(五蘊)을 말한다. 여래의 성품으로서 불성이 오온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는 ‘능엄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핵심 논의는 불성과 오온과의 관계이다. 왜냐면 오온은 끊임없이 변천하는 실체가 없는 허구,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 실체가 없다. 반면에 불성은 항상 존재하는 영성이다. 하나는 자아가 없지만 다른 하나는 자아가 있고, 하나는 고통이지만 다른 하나는 고통이 없고, 하나는 물들어 있지만 다른 하나는 청정하다. 이들의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오온은 개념적인 관점을 말한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능력이 있어야 인정을 받는다. 이런 문장은 바로 개념에 의해서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개념에 의해서 자기를 규정하는 언어적인 감옥이다. 이것은 고통이고 좌절이고 쉴 날이 없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조견오온(照見五蘊)에서 보듯이 이런 오온을 비추어서 바라봄은 개념적 자기는 아니다. 이것은 개념화된 감정이나 생각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방식으로서 개념에 갇힌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으로부터 벗어난 관점을 보여준다. 오온이 인식의 내용이라면, 조견은 그 내용을 바라보는 인식의 주관이다. 하지만 이때 언어적인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 관찰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의 주관과 대상이 모두 제거되거나 그대로 허용하는 관점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텅 비어 있음[空]이다. 텅 비어 있음은 개념적 내용과 그것을 관찰하는 주관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바탕이다. 비유하면, 흰 돌과 검정돌이 바둑판에서 서로 싸움을 한다. 흰 돌은 긍정적인 자기이고, 검정 돌은 부정적인 자기이다.

 

검정색과 흰색의 돌은 모양과 형상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하지만 바탕은 그 자체로 아무런 색깔이 없고, 모양이 없다. 하나의 배경이고, 텅 빈 들판과 같다. 그러나 흰 돌과 검정색 돌이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우리는 바탕, 본성, 불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검정색의 바둑돌과 바둑판의 바탕은 서로 구별되지만, 실제로 바둑을 두는 사람은 다시 말하면 바둑판에 놓인 바둑의 돌은 그 판과 구별하기 어렵다. 왜냐면 바둑돌이 놓인 그 자리가 바로 바둑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뇌는 그대로 불성이다. 번뇌와 불성을 동일시하지 않지만, 번뇌는 바로 텅 빈 들판의 근거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발생은 바로 인연, 연기에 의해서 일어난다.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본성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온은 그대로 여래장이고 불성이다. 그래서 오온에 불성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인 이해이다. 다음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을 향하고,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 들판에 눈이 내렸다. 강물은 변함없이 마을을 관통하여 흘렀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