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물었다.
“나무가 메마르고 나뭇잎이 떨어질 때 어떠합니까?”
그러자 운문화상이 대답하였다.
“가을바람에 온전히 드러났다(體露金風).”
지금이다. 가을이 온전하게 깊어지고 거리마다 노랑 은행잎으로 가득 찬다. 여기저기에서 떨어진 낙엽을 쓸어낸다. 쓸어도 곧 다시 떨어지니, 떨어진 낙엽으로 다시 쓸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또 다시 쓸어내야 한다. 이것도 옳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떡갈나무의 빨간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졌고, 은행나무의 노란 잎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이렇게 나뭇가지는 메말라 가고 나뭇잎이 떨어질 때, 어떠한가? 떡갈나무와 은행나무는 가을바람에 온전히 그 바탕이 다 드러났다. 지금 저기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아직 떨어지지 않는 잎사귀가 바람에 나부낀다. 이것 역시 옳다.
어떤 사람은 진리가 감추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리가 다 드러나 감추어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어떠한가? 온전하게 다 드러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는 쪽인가? 어느 쪽인가?
이들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가진다. 진리가 다 드러났다고 하면 그것은 감추어진 것이다. 이것이 진리라고 규정하고 말하는 순간에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량분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추어져 있다면 진리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진리는 이미 스스로 온전하게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드러남과 감추어짐의 변증법적인 중도는 어디인가?
드러남도 아니고 감추어짐도 아닌 자리는 어디인가? 드러났다면, 무엇이 드러난 것인가? 감추어져 있다면 무엇이 감추어진 것인가? 대답하여 보라면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운문화상은 삼구로서 학인을 지도하였다. 첫째는 천지를 뒤덮는 구절(함개건곤구·函蓋乾坤句), 둘째는 물결을 따르는 구절(수파수랑구·隨波遂浪句), 셋째는 흐름을 끊어버리는 구절(재단중류구·裁斷衆流句)이 그것이다.
첫째의 구절은 온전히 드러난 긍정의 표현이다. 일체는 이미 그 자체로 드러나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셋째의 다양한 흐름을 끊어버리는 구절은 일체의 분별을 끊어버리는 부정이다. 그러니 진리는 감추어진 채로 남겨진다. 어떤 표현도 여기서는 어긋난다. 여기에 입술을 댈 수가 없다.
둘째의 물결을 따르는 구절은 긍정과 부정을 말하지 않는 채로, 그 흐름에 순응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일종에 인연에 따르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일까? 이들은 서로 동일한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을 뿐,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한 구절에 이들 세 가지는 항상 함께 한다. 한 개의 화살이 이들 삼구를 꿰뚫고 지나간다. 이것이 바로 공안 속에 일구로서 화두이다.
어떤 승려가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화상은 “뜰 앞에 잣나무”라고 대답한다. 뜰 앞의 잣나무는 위에서 말한 삼구를 일거에 꿰뚫은 일구이다. 이 일구는 천지를 뒤덮고, 온갖 억측을 끊어버리고, 그러면서도 거센 물결을 따른다.
지금 문을 열고 보니, 저기 뜰 앞의 잣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면서 긴 그림자와 함께 저녁노을처럼 물들어 가고 있다. 온전히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말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72호 [2010년 11월 16일 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