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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77. 그는 누구인가

slowdream 2010. 11. 3. 15:02

[선문답 산책] 77. 그는 누구인가
과거·미래의 부처도 ‘그’로부터 비롯
‘나’는 실제 존재자 아닌 의식의 일부
기사등록일 [2010년 11월 01일 17:11 월요일]
 

오조법연 화상이 말했다. “석가와 미륵도 그의 노예이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문화상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다른 사람의 활을 당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타지 말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일을 알려하지 말라.”

 


 

그는 누구인가? 석가와 미륵도 그[他=渠]의 노예이다. 과거의 부처도 미래의 부처도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누구인가? 여기서 그로 번역된 타(他)는 다른 사람을 말하지만, 삼인칭으로 사용되는 거(渠)와 동일한 의미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는 타인을 의미한다. ‘그는 누구인가?’는 바로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이 나인가?’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바꾸어서 질문하면 보다 구체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질문을 하든지 양자는 동일한 내용이다.

 

무엇이 나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확립, 혹은 외계의 사물에 대한 앎이 아닌 바로 자신에 대한 앎을 강조한다. 이런 질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과 종교의 핵심 질문이었다. 서구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점에 대해서 근대의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정의하였다. 사유하는 것이 바로 나이고,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사유작용은 인간에게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 현존하지 않는 위협에 대해서도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 물론 현존하지 않는 위협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안전한 공간으로 바꾸는 노력으로 높은 문화를 건설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전통적인 고대 인도에서는 자신이란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자’로 정의한다. 심리적인 내용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관조하는 자가 있고, 이것이 바로 참된 나라는 인식이다. 불안과 같은 정서나 강박적인 사고 작용과 같은 마음현상을 응시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나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불안이나 사유 작용에서 벗어나는 장점이 있다. 왜냐면 불안과 사유작용을 그 자체로 조용히 바라보는 자는 적어도 바라보는 그 동안에는 불안과 사유작용에서 벗어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자에 대해서 정밀하게 관찰한 붓다는 말한다. 사유작용을 하는 존재로서 나는 실제로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것도 의식의 일부라고 말한다. 사고작용은 존재하지만, 그런 사고작용을 소유하는 존재자는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안을 비추어 보는 자는 불안으로 말미암아서 존재하게 된다. 불안과 그것을 관찰하는 자는 서로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현상이다. 불안이 사라지면 불안을 응시하는 자, 역시 동시에 사라진다. 불안이 사라지면 불안을 관찰하는 자, 역시 존재하는 근거가 없어진다. 이들은 서로 기댄 볏단과 같다.

 

물론 이렇게 반론할 수가 있다. 불안이 사라지면 관찰하는 자는 다른 대상을 관찰함으로서 존재를 증명한다고.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존재하기에 관찰하는 자도 역시 존재한다. 이때 관찰하는 자기는 존재자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한다. 관찰하는 자는 고정된 불변의 속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것은 대상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성격이 바뀐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관찰한다. 이 역시 주관적인 흐름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식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이 모두 함께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곳에는 고정되고 항상된 존재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인가? 사유하는 마음현상도 내가 아니고, 사유함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그것으로서의 나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인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70호 [2010년 11월 01일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