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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산책> 84. 현사의 세 가지 병

slowdream 2010. 12. 27. 00:25
84. 현사의 세 가지 병
 
중생은 개념적인 사유로 세상을 이해
분별없이 경험 그 자체를 느끼려 해야
 
출처 법보신문 / 2010.12.21 14:58 입력 발행호수 : 1077 호 / 발행일 : 2010년 12월 22일
 

현사화상은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제방의 선지식들은 수행자를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런데 눈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눈 봉사는 앞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불자를 세우거나 손가락을 내보일 수가 없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주장자를 치는 아무런 우렁찬 법문도 그 앞에서는 효력을 상실한다. 벙어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의 멱살을 잡고 말해라 말하라고 다그쳐 보지만 실패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공안은 일체의 사량과 총림의 조사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을 모두 제거한다. 눈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의 세 가지 병에 걸린 사람에게 어떻게 대접을 할까?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어떤 스님이 이를 운문화상에게 말하자, 운문은 그의 뜻을 알고, “너는 절 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 사람이 절하고 일어나자, 주장자로 밀어버렸다. 그 스님이 뒷걸음을 치자 운문화상은 “눈이 멀지 않았군.” 말하고, 다시 앞으로 오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앞으로 오자 운문은 “귀머거리는 아니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알았느냐?” 질문을 했다. 그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자, “벙어리는 아니군.” 말하였다. 이에 그 승려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런 경에 그 승려는 귀머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 봉사도 아니다. 또한 벙어리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듣고, 말을 하고, 사물을 본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그를 대접할까? 일체의 분별을 끊어버린다.


이것은 남전화상의 제시한 공안과 같다. 어떤 승려가 남전화상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는 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남전화상은 “있다”고 답했다.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않는 법입니까?” 이에 남전화상은 말했다.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처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것 역시 일체의 분별을 끊어버린다.


분별을 끊어버리는 것, 이것이 참 좋은 일이다. 분별이 있으면 결코 그것을 만날 수가 없다. 우리는 언어로 사유하고, 그 사유로 말미암아서 온갖 고통을 만들고 환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런 개념적인 사유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달을 직접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달이란 언어를 통해서 달을 본다. 그러나 이 달은 실재하는 달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적인 달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그냥 보지를 않는다. 그것을 볼 때 이미 어떤 관념에 물들어 있다.


연습해 보자. 앞에 있는 사람을 보라.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이미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이해와 편견에 의해 바라보고 있음을, 무엇보다도 어떤 무의식적인 기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만날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방안에 많은 물건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나에게 의미가 있어 지금 그곳에 놓여 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그냥 그것을 보지 않는다. 소리를 들을 때 그냥 듣지 않는다. 이미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소리를 해석하고 판단한다. 말을 할 때 그냥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순간에 벌써 자신의 의견과 편견이 개입된다. 이런 모든 주관적인 의견을 떠나서 이런 판단은 잠깐 멈추고,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다시 연습해 보자. 눈 봉사가 되어서, 귀머거리가 되어서, 어떤 분별을 하지 않는 채로, 내게 닥쳐오는 경험을 존재하는 그대로 느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렇지만 눈발은 세상을 뒤덮는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