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말룽끼야뿟따여,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말룽끼야뿟따여, ‘세상은 유한하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영혼은 육체와 같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영혼은 육체와 같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나는 설명해야 할 것은 설명했고, 설명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생성이다‘...’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나는 그것을 왜 설명했는가. 그것은 유익하고 청정한 삶과 관계가 있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설명했다.
*번역 출처 전재성 박사 <명상수행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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