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비어 있음의 쓸모>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바퀴살 서른 개가 한데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한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수레의 쓸모가 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릇의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비어 있음으로 인해 방의 쓸모가 있다. 有는 이로움을 위한 것이며 無는 쓸모를 위한 것이다.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無는 절대적 無, 즉 없음이 아니다. 無는 상대적 無로 부재(不在)를 뜻한다. 부재는 곧 ‘비어 있음’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또한 부재로서의 無를 얘기했는데, 그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현존재(現存在), 공존재(共存在)는 佛家의 緣起와 매우 닮았다.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릇의 쓸모가 있다.’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가. 그 울림이 나지막히 가슴을 적신다. 수천 년 전의 지혜 앞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이내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우선적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그래서 사물의 겉모습에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다. 有의 존재에 마음을 빼앗기고, 無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고 산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잊혀진 것이 곧 無이다. 無는 有의 저편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有의 바로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다만 감각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길이 無를 외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를 빗대자면, 有 또는 無만을 직시하는 태도를 소유론적 사유방식, 有와 無를 동시에 직시하는 태도는 존재론적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소유론적인 사유방식에게는 無란 ‘없음(비존재)’이며 有만이 있음(존재)이지만, 존재론적인 사유방식에게는 無란 ‘비어 있음’이며 有는 곧 유한(有限)한 존재, 無는 무한(無限)한 존재이다. 의미론적으로 보면, 有는 유한한 의미이며 無는 무의미가 아니라 무한한 의미인 것이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利는 칼로 벼를 베는 모습에서, 用은 속이 빈 대나무 토막에서 유래했는데, 여기에 有와 無를 연관시킨 노자의 솜씨가 아주 절묘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자가 有를 부정적으로 보고 無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유위와 무위를 대하는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有와 無에 가치평가를 내리면 안 된다. 소유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양식이 유위이며, 존재론적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양식이 무위이므로, 닫힌 유위를 버리고 열린 무위를 지향하라고 노자는 역설했던 것이다. 노자가 그릇과 방을 비유로 들어 無를 강조한 까닭은, 有에 쏠린 눈길이 지나치다는 우려에서이다. 실상 利와 用을 한데 묶어 쓰듯이 有와 無는 동등하다. 방에 창과 문이 있어야 방의 쓸모가 있지만, 허공을 분절하여 공간을 만드는 벽[有]이 없다면 또한 방[無]의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항아리를 장식용으로 방에 놓아 심미적 가치를 높인다면, 利와 用의 관계는 뒤집힌다. 젓가락은 그 자체가 利이며 用이다. 차별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에서 엉뚱하게도 또다른 차별심을 끌어내서는 안 될 일이다.
당나라 시절에 구지(俱胝) 화상은 불법에 대해서 물으면 무조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들었다. 구지 화상을 시중드는 동자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찾아와서“구지 화상께서는 어떤 법문을 설하는가?”하고 물으면 일지선(一指禪)을 흉내내어 역시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구지 화상은 동자가 자기의 불법을 흉내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하루는 동자를 불러 물었다.
“무엇이 부처냐?”
동자가 손가락을 세우자 소매 속에 숨긴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동자에게 구지 화상이 다시금 불러세워 물었다.
“무엇이 부처냐?”
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세웠지만 손가락이 없음을 확인하고 문득 그 자리에서 홀연히 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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