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9장. 넘치는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slowdream 2007. 8. 10. 17:20
 

<제 9장. 넘치는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넘치는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날카롭게 단련하면 오래지 않아 무뎌진다. 금과 옥이 집안 가득하면 지키기 힘들다. 부귀와 교만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일을 이룬 후에 물러나는 것, 이는 하늘의 道이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지이영지 불여기이 췌이예지 불가장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禪家에 회자되는 영구예미(靈龜曳尾)란 사자성어가 있다. 신령한 거북이가 모래 속에 알을 낳고서 다른 짐승이 눈치 못 채도록 꼬리로 발자국을 지우면서 떠나지만 결국 그 꼬리의 흔적 때문에 들키고 만다는 뜻이다. 신령한 거북이는 뭇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신이 지닌 알음알이가 진리인 양 착각하지만, 결국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에 발목이 잡힌 ‘헛똑똑이’에 지나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평가하고 절단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가 바로 그들의 무기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노상강도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집으로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린다. 세간의 지식은 쌓을수록 인정을 받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지혜는 세속적인 지식 나부랭이를 비워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노자는 걸핏하면 역설의 논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논리이다. <도덕경>이 노린 독자는 필경 지식인일 수밖에 없다. 문자와 지식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철학’은 몇몇 소수의 몫인데, 수천 년 전 고대 사회는 두 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첨예한 논리와 엄청난 양의 지식으로 무장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사실 이런 수준의 역설은 별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며 맹자며 순자, 묵자 등의 사유체계와 그 깊이를 가늠해 보라. 시대적 적합성이나 논리적 정당성 등의 문제는 젖혀두고. 그들을 상대로 노자가 범부(凡夫)에게나 먹혀들 처세의 논리를 제시했겠는가? 일례로 <논어(論語)>에도 주옥 같은 명언이 즐비하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짧은 경구, 잠언(箴言), 산문시 형식인 <도덕경>에 비해, 儒家들의 논쟁과 저작은 오히려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다.

 

  이런 점에서도 <도덕경>이 노자의 권위를 등에 업은 무명인들의 위작(僞作)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돌출되었지만, 또 다른 긍정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즉 노자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無와 有의 현상계를 통해서 궁극적 원리인 道를 보라’는 한층 더 고차원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입신(立身)의 논리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현상계를 지배하는 질서를 확인하자는. 선승(禪僧)들의 화법에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있다. 진제는 참된 진리, 속제는 속세의 진리라 할 수 있겠다. 중생은 근기(根機), 즉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저마다 다른 까닭에, 상황에 따라 진제와 속제를 적절히 섞어서 교화하는 방편(方便)의 하나이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도 한다. 맹자도 가르침을 거부하는 태도 역시 가르침의 하나라 했다. 말하자면, <도덕경>의 화법 또한 이러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不仁과 仁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

 

  달이 그렇듯 차면 기울고, 해가 그렇듯 올라가면 내려온다. <주역>의 64괘 가운데 중천건(重天乾)괘 상구효(上九爻) 풀이가 “높은 자리에 오른 용이니 뉘우침이 있다(亢龍 有悔)”이며, 풍택중부(風澤中孚)괘 상구효(上九爻) 풀이도 “나는 소리가 하늘에 오르니 고집해서 흉하다(翰音登于天 何可長也)”이다. 이는 하늘의 이법인 道이다.

 

  중국 선종의 1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궁으로 불렀다. 

  무제가 한껏 부푼 표정으로 달마대사에게 질문했다.

“짐이 한평생 절을 짓고 보시를 하고,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소?”

“없습니다[無].”

  짐짓 실망한 무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인가?”

“탁 트여서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廓然無聖).”

  약이 잔뜩 오른 무제가 되받았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모릅니다[不識].” 

  그 길로 궁을 빠져나온 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행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