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slowdream 2007. 8. 10. 17:16
 

<제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그 까닭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뒤로 하기에 앞서고, 그 몸을 아끼지 않기에 몸을 보존한다. 나를 비움으로써만이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는가.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자생 고능장생)

 

  90년대 초반 <천장지구>란 제목의 홍콩 영화가 수입된 적이 있었다. 유덕화, 오천련 주연의 영화로 감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은이들을 매료시켰는데, ‘천장지구’는 道의 실현인 自然은 참되고 영원하다는 원래의 의미가 탈색되고 ‘영원한 사랑’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백거이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한 사랑을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로 빗대서 표현한다.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한쪽에만 있어 암수가 한 몸이 되어야 날 수 있다는 전설 속의 새이고, 연리지는 두 그루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져 자라는 희귀한 경우를 가리킨다. <장한가>의 마지막 구절을 옮겨본다.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연리지가 되리

天長地久有時盡   영원하다는 천지도 다함이 있으나

此恨綿綿無絶期   사랑의 한은 길이길이 다함이 없네


  不自生은 곧 상생(相生)에 다름 아니며, 이는 佛家의 연기(緣起)와도 같다. 상생은 고대 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伏羲)의 선천 8괘에서 비롯한 천도(天道)의 이치인 바, 오행(五行)이 서로 생하는 원리이다. 즉, 木은 火를, 火는 土를, 土는 金을, 金은 水를, 水는 木을 생해준다. 나무는 자신을 태워서 불을 일으키고, 불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땅은 온갖 형태의 광물을 길러내며, 바위 틈에서 샘물은 솟아나온다. 그리고 물은 나무 뿌리를 적신다. 이러한 상생의 순환은 너와 나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의 합일이며 道를 실천하는 참된 삶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역설(逆說)의 논리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유쾌하다. 통속에 덜미 잡힌 우리의 소박한 인식을 전복시키는 까닭에서이다. 몸을 낮추니 높아지고, 몸을 돌보지 않으니 오히려 보존되며, 나를 버리니 나를 이룬다. 그러나 통설(通說)은 일방향의 논리로 다양한 관점을 원천봉쇄하여, 자기 부정(否定)의 기회를 박탈한다. 자기 부정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패스워드(password)이다. ‘작은 나(小我)’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큰 나(大我)’로 업그레이드 된다. 禪家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크게 죽어 도리어 살아남(大死却活)’, ‘백 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걸음 더 허공에 몸을 날리다(百尺竿頭 進一步)’로 표현한다.

 

  조주 스님이 투자(投子) 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도리어 살아날 때에는 어떠합니까?”

  투자 스님 왈,

“밤길을 가지 말고 낡이 밝아 모름지기 이르러야 한다.”

  번뇌와 무명, 생멸의 중생심을 벗어던지고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진여무심(眞如無心) 대경계에 이르면 어찌해야 하는가. 살인도(殺人刀)로 번뇌와 무명을 뿌리뽑고, 활인검(活人劍)으로 불심(佛心)의 지혜를 자유로이 활용하는 경계. 노자의 화법으로 얘기하자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