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2장.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slowdream 2007. 8. 10. 18:47
 

<제 12장.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만들고 다섯 가지 음은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버리게 한다. 말타기와 사냥은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행동을 그르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으며 눈을 버리고 배를 취한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오색영인목맹 오음영인이롱 오미영인구상)

 

  오색, 오음, 오미 등은 모두 오행(五行)의 영향에 따라 구분된 것이다. 오색은 청색ㆍ적색ㆍ황색ㆍ흰색ㆍ검은색이며, 오음은 궁ㆍ상ㆍ각ㆍ치ㆍ우이며, 오미는 신맛ㆍ쓴맛ㆍ단맛ㆍ매운맛ㆍ짠맛이다. 儒家에서 얘기하는 오상(五常), 즉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도 오행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음, 오미, 오색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유위적인 분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다섯 가지 맛 모두를 고루 평등하게 다루지 않고 몇몇 특정한 맛만을 선호한다. 즉, 편식의 습관에 절로 빠져드는 것이다. 일체의 맛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식을 버릴 때 무미지미(無味之味)의 참된 맛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곧, 유위의 삶이냐 무위의 삶이냐가 관건인 것이다.

 

  노자를 계승한 장자(莊子) 또한 같은 얘기를 한다.

“본성을 잃게 하는 것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오색이 눈을 어지럽히며, 그 둘은 오성이 귀를 어지럽히며,  그 셋은 오취가 코를 어지럽히며, 그 넷은 오미가 입을 어지럽히며, 그 다섯은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취하고 버림[取捨]이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얘기는 곧바로 불가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만 버린다면 저절로 명백해지리라.’의 가르침이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치빙전렵영인심발광 난득지화영인행방 시이성인위복불위목 고거피취차)

 

  예로부터 오감(五感)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인 바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서 육감이라 했는데, 여섯번째 감각기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허나 佛家에서는 오래 전부터 마음[心]을 여섯번째 감각기관으로 이해하고 이 모두를 합하여 육근(六根)이라 정리하였다. 동양에서는 대체로 마음에 대해서 물질성을 가장 많이 떨군 기(氣)로 이해하는 데 동의한다. 佛家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넷으로 나누는데, ‘수(受)’는 감수(感受), ‘상(想)’은 표상, ‘행(行)’은 의지, ‘식(識)’은 인식판단 등의 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識을 마음의 주체로 보고, 나머지는 마음의 속성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편을 가르자면, 맹자와 주자는 마음에 도덕적 판단력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고자(告子)와 순자(荀子)에게 마음이란 욕정이나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노자는 어느 쪽에 가깝겠는가. 

 

  心發狂과 人行妨은 佛家에서의 번뇌와 다름 아니다. 번뇌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인데, 무명은 지적인 측면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 갈애는 감정적인 측면으로 온갖 욕망을 말한다. 이는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으로 구체화된다. 三毒은 탐(貪)ㆍ진(瞋)ㆍ치(痴)로,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貪, 싫은 것을 버리려는 마음이 瞋, 痴는 無明을 말한다. 오욕은 재욕(財欲)ㆍ성욕(性欲)ㆍ식욕(食欲)ㆍ명예욕(名譽欲)ㆍ수면욕(睡眠欲)으로 그중 재욕과 성욕이 대표적인 욕구랄 수 있겠다. 성철(性徹) 스님은 “중생들이 시주하는 재화를 자기 목숨을 노리는 화살처럼 여기라(施物如箭)” 일침한 바 있다. 이는 출세간과 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소중한 가르침으로, 시물을 재화로만 한정짓지 않고 5욕 전부로 확장시켜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배[腹]는 3장에서와 마찬가지로 自然이며,‘自然은 道의 궁극적 실현인 현실적 대상이므로, 다시 말해 道의 비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