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5장. 채움이 아닌 비움으로

slowdream 2007. 8. 10. 18:49
 

<제 15장. 채움이 아닌 비움으로>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客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道를 체득한 옛사람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그려내자면, 겨울에 강을 건너듯 주저하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머뭇거리고, 손님처럼 삼가하고, 곧 녹으려는 얼음처럼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통나무처럼 질박하고, 계곡처럼 트이고, 흙탕물처럼 탁하다.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차 맑아지게 할 수 있는 자 누구겠는가. 편안히 자리한 것을 오랫동안 움직여 점차 생동하게끔 할 수 있는 자 누구겠는가. 이러한 道를 지닌 사람은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에 능히 가리고 새로이 이루려 하지 않는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客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예언 약동섭천 유혜 약외사린 엄혜 기약객 환혜 약빙지장석 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道는 이미 道가 아닌데, 하물며 道를 체득한 사람이 어떠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어쩔수없이 표현을 하자니 이러저러한 비유를 든 것이며, 이는 한마디로 무위로 귀결된다. 노자가 지향하는 궁극적 삶은 무위자연이다. 물론 여기서의 自然은 우리 눈에 드러난 물리적 自然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 즉 그 어떤 근거도 갖지 않는‘자기원인인 절대자유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自然은 내재적 의미와 그 외연이 일치한다.‘스스로 그러함’의 이법이 고스란히 무늬로 새겨진 현상계의 존재이며, 무위 그 자체인 것이다. 自然은 주어(主語)이며 무위는 술어(述語)이다. 자연철학적인 의미에서, 노자에게 自然은 인간을 포함한 현상계의 전부이다. 自然은 절대이법이자 질서ㆍ법칙ㆍ구조이며 또한 그 이법을 구현하는 현상계의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유위의 삶을 꾸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인가? 단언하자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 여기지만, 역설적으로 그 목소리의 크기만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노자는 무위, 무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무위는 코끼리가 강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고, 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듯 머뭇거리고, 손님의 예의를 다해야 하는 것처럼 삼가고, 이제 막 녹으려는 얼음처럼 맺힘이 없어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벽이나 기둥 또는 책상, 땔감 등 어떤 모습으로 변하기 전의 순수한 통나무처럼 질박하고, 만물의 젖줄인 계곡처럼 확 트이고, 모든 것이 한데 얽힌 흙탕물처럼 탁하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로 무장한 유위는 주저함이 없고, 머뭇거림이 없고, 탁하지 않다. 

 

  5조 홍인선사가 인가를 받은 혜능에게 법과 가사를 전하며 당부했다.

“이제 네가 6대 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를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며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터이니 모름지기 어서 떠나도록 하여라.”

  혜능이 떠난 후 여러 무리가 뒤를 쫓았으나 이내 포기하고,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한 혜명이라는 스님만이 뒤를 쫓다가 마침내 혜능을 발견하고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선뜻 가사를 건네주자, 혜명은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니,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방금 전 가사를 빼앗으려는 마음과 지금 道를 구하려는 마음 중 앞의 마음은 무엇이며 뒤의 마음은 무엇이냐?”

  혜명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혜능이 이내 입을 열었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고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 면목을 자각하라(不思善 不思惡 父母未生前 誰是本來面目).”

  혜명은 그 말끝에 문득 마음이 열리었다.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동지서생 보차도자불욕영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濁에서 凊으로 安에서 生으로. 이는 有에서 無로, 그리고 다시금 無에서 有로의 순환을 뜻한다. 한 번 고요함으로써 탁함이 서서히 맑음으로 변하고, 한 번 움직임으로써 가만히 있는 것이 서서히 꿈틀거린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一陰一陽之謂道’이다. 盈은 有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며, 不盈은 비어 있음 즉 無의 존재 또한 함께 품는다는 것을 말한다. 道를 체득한 사람은 무위를 실천하기에, 有나 無 어느 한쪽만을 바라보지 않고 둘을 함께 시선에 담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서지 않고 물러서는 일에 능하며, 뭔가를 새로이 꾸려 주위의 눈길을 끄는 짓도 하지 않는다. 채움의 삶이 아니라 비움의 삶. 왜곡되고 비틀린 욕망이 아니라, 中道의 길을 걷겠다는 참된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