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6장. 비움을 지극히 하고 고요를 지킨다

slowdream 2007. 8. 10. 18:51
 

<제 16장. 비움을 지극히 하고 고요를 지킨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비움을 지극히 하고 고요를 돈독히 지킨다. 그리하여 만물이 아울러 펼쳐지며, 이로써 나는 그 되돌아감을 본다. 무릇 만물이 무성하면 제각기 그 근거로 돌아간다. 근거로 돌아감이 고요이며, 이를 가리켜 명으로 돌아감이라 한다. 명으로 돌아감이 항상이며, 항상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항상함을 모르면 망령되이 흉하다. 항상함을 알면 너그럽고, 너그러우면 공평하며, 공평하면 왕이요, 왕은 하늘이며, 하늘은 道며, 道는 영원하다. 몸을 잊으면 위태롭지 않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귀근왈정 시위복명) 

 

  <도덕경> 해석의 권위자로 이름을 떨친 왕필이 道를 無로 이해하고 無의 성품을 허정(虛靜)이라 얘기했는데, 허정은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한다. 왕필이 노자를 곡해했다는 것은 다름 아닌, 無를 현상계의 한 양태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無는 이법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주자(朱子)는 無를 이법(理法)으로 이해했으나, 그 역시 無를 현상계 有의 상대적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류를 빚는다. 노자를 복원시키는 작업은 단순히 그의 사유를 정확히 읽고 재평가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이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관점의 정립에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虛(비어 있음)ㆍ靜(고요함)을 無의 세계라 한다면,  盈(가득함)ㆍ動(움직임)은 有의 세계이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은 無가 정점에 이르면 有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夫物芸芸 各復歸其根은 有가 정점에 이르면 無가 펼쳐진다는 얘기이다. 결국 有와 無가 서로의 근거로 되돌아가는 緣起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靜 -> 芸芸 -> 靜 -> 芸芸 (無 -> 有 -> 無 -> 有)……. 復命은 이러한 緣起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므로, 命은 天命이자 자연의 법칙, 곧 緣起法이겠다. 腹을 해자하면, ?는 발 모양을 나타낸 것이고, ? 위의 글자체는 풀무이며, ?은 사람이 오가는 길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즉 발의 왕복운동을 통해 풀무가 바람을 일으키고, 또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므로 ‘회복하다, 오고가다’의 뜻이다. 좀더 뒤에서 얘기되겠지만, 여기에 ‘뒤집히다’는 의미 또한 추가된다. 그러므로 復은 곧 반(反)이며, 易이다. <주역>의 24번째 괘가 지뢰복(地雷腹)인데, 열두달 가운데 가장 추운 동짓달(음력 11월)을 가리키며, 陰氣 다섯이 극성한 가운데 땅밑에서는 陽氣 하나가 서서히 움을 트는 그런 모습이다.

 

  生을 ‘펼쳐지고’, 根을 ‘근거’로 옮긴 것은 즉물적인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無가 有를 낳는다’ 또는 ‘無가 有의 뿌리이다’ 하는 표현은 본(本)―말(末) 또는 본체(本體)―현상(現象) 등의 이분법적 도식을 연상시켜 자칫 無가 有보다 좀더 월등하다는 존재-가치론의 폐해를 불러올 수 있다. 현대과학에서 입증한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보존(불변)의 법칙’과 관련시켜 보아도, ‘낳는다, 생기다’보다는 ‘펼쳐진다’가 훨씬 적합한 표현이지 않겠는가.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이와 관련된 구절이 나온다.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모든 존재는 공하여 태어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이는 곧, 有는 無로 돌아가고(펼쳐지고) 無는 有로 돌아가므로(펼쳐지므로) 생멸도 없고 늘어남과 줄어듦도 없다는 뜻이다. 有와 無는, 손의 양면 즉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어느 한쪽만을 손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으며, 손바닥과 손등 모두가 있어야 손인 것이다.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緣起적인 관계이다.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복명왈상 지상왈명 부지상 망작흉)

 

  命으로 돌아감, 緣起의 법칙인 道를 따르는 것이 항상(恒常)이라는 얘기는 緣起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이법, 궁극적 원리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이법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므로, 깨닫지 못하면 삿된 망념으로 인해 삶이 올곧지 못하고 어지러워진다. 凶은 죽은 사람의 가슴에 찍은 낙인의 모습에서 비롯하였는데, 말하자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산송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무서운 질책이겠다. 6조 혜능선사 왈, “자기 성품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으로 확연히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이는 곧 해탈이라(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容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너그러운 것이다.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에 다른 눈길을 주지 않으며,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다룬다. 이러한 자야말로 만물을 주재하며, 이는 곧 하늘이고, 하늘은 道다. 王을 제후나 천자라 한다면, 이러한 道를 깨달은 자만이 제후와 천자의 자격이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沒身不殆에서 몸은 바로 나와 남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분별지의 비유이다. 나와  세계와의 구분은 몸을 경계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런 즉 몸에 집착하는 마음을 잊으면 생멸하는 번뇌에서 벗어나기에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의 마조(馬祖) 선사의 법문 가운데 유명한 것이 바로,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 ‘바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卽佛)’이다. 선을 생각하지도 않고 악을 생각하지도 않는 인간 본래의 마음이 곧 道이며 부처라는 것입니다. 평상심이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일상적인 마음이 아니라 무차별하고 항상한 마음을 가리킨다.

  마조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인 남악(南嶽) 스님이 슬그머니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남악 스님이 기왓장 하나를 집어다 마당에서 갈기 시작했다. 마조 스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 생각이네.”

“기왓장을 간들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좌선을 한들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 스님이 대꾸가 없자 남악 스님이 말씀하셨다.

“스님은 좌선을 배우는 것인가, 앉은 부처를 배우는 것인가?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있지 않으며,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네. 머무름이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하는 것일세.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