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4장. 위라서 밝은 것도 아니고

slowdream 2007. 8. 10. 18:52
 

<제 14장. 위라서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래라서 어두운 것도 아닌>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 아련함이라 이름한다.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 아득함이라 이름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희미함이라 이름한다. 이 셋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 까닭에 그냥 뭉뚱그려서 하나로 한다. 위라서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래라서 어두운 것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질 뿐 이름 붙일 수 없다. 한 물건도 없는, 즉 모양 없는 모양, 한 물건도 없는 형상으로 돌아가니 가히 황홀이라 말한다.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으며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옛 道로써 오늘의 有를 다스린다. 그리하여 옛 시초를 알 수 있으니 이를 道의 벼리라 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부득 명왈미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1장, 25장과 더불어 노자는 여기에서 道의 정의를 내린다. 한마디로, 뭐라 이름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오감이나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밝혀낼 수 없다.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지만 어쩔수없이 언어로 담아내야 한다면 道라 이름할 따름이다. 그리고 夷ㆍ 希 ㆍ微 각각으로는 道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므로, 세 가지 특질을 한데 뭉뚱그려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道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道를 상대법적인 현상계의 실체로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름할 수 없다고 아무리 강조를 해도 인간은 대상을 표상하는 내적 한계를 갖고 있기에 道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힌다. 이런저런 꼴로 道를 규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道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와 부처는 일치한다. <금강경>에서 부처와 제자 수보리가 나눈 대화 한 토막을 엿들어보자.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취하지 않고, 법이 아닌 것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도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법이 아닌 것은 말해 무엇하겠느냐.’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위 없는 지혜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위 없는 지혜라 이름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할 만한 정해진 법도 없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닌 까닭입니다.”

 

  繩繩이란 새끼를 꼬듯 끝없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하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다는 것이다. <주역 계사전>의 “음양은 모든 곳에 편재하며, 태극은 형체가 없다(神無方易無體)”와 같은 맥락이겠다.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황홀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物ㆍ狀ㆍ象은 모두 감각적,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이미지(image)인 현상계를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본질ㆍ형상 등으로 옮기는 까닭에, 플라톤의 형상과 노자의 象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형상은 사물을 존재케 하는 질서ㆍ이법에 가깝다. 노자의 象에 대한 개념은 당대 중국의 인식에 기준해야 한다. <주역>에 따르면,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하늘에서는 형상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용을 이루니 변화가 나타난다).” 좀더 세분화하자면, 象은 현상계의 추상적[보편적] 이미지인 無요, 形은 구체적[개별적] 이미지인 有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변화’가 易이요, 노자의 道인 것이다. 그런 즉, 物은 有요, 狀은 形으로 無狀之狀은 개별적 이미지가 아닌 개별적 이미지 즉 보편적인 이미지를,  無物之象 역시 보편적인 이미지로 無物과 함께 현상계의 無를 가리킨다. 그리고 是謂恍惚은 有와 無의 복귀 내지 순환을 뜻하는 것으로, 1장에서의 玄之又玄(신비하고 신비할 따름)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道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모든 곳에 두루 자리하니, 당연히 머리를 볼 수도 꼬리를 확인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復歸於無物에서 돌아감의 주체를 앞문장에서 설명한 道로 이해하고, 無物 또한 道로 이해하면, 道가 道로 돌아간다는 모순에 빠진다. 복귀의 주체는 道가 아니다. 13장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세상을 떠맡길 수 있다”라 하였는데, 복귀의 주체는 바로 몸이다. ‘몸을 던진다’는 얘기는 有에 치중한 이분법적인 분별지를 버린다는 뜻으로, 그럼으로써 道에 순응하여 無의 차원 또한 인식에 담는다는 것이다. 13장과 이어서 해석하지 않으면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復歸란 이법이자 질서인 道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는 有와 無의 차원을 순환한다는 뜻이다. 복귀이자 순환은 상대적인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상보적인 관계로 서로‘소통’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를 깨달음으로써 ‘인식론적 전환’이 발생하고, 이는 ‘존재론적 전환’으로 이어져서 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간을 탈바꿈시킨다. 이것이 바로 “몸을 던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세상을 떠맡길 수 있다”는 표현의 숨은 의미이다.

 

  현상계를 시간과 공간의 차원으로 나누고, 공간을 공존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세계는 유한한 有의 차원일 뿐이며 바로 그 주위에는 ‘무한한 有’ 즉 無의 차원이 도사리고 있다. 또한 시간을 계기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면, 각 개체는 無(비어 있음, 이름 없음)와 有(채워 있음, 이름 있음)의 차원을 반복한다. 강물에 거품이 일었다 사라지는 것처럼,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생멸(生滅)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有는 생이요, 無는 멸이라 할 수 있겠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古는 <지금, 여기>의 현상계와 대조시킨 무시무종한 道의 근원에 대한 비유이다. 현상계를 통해서 道에 접근할 수 있기에, <지금, 여기>의 현상계를 道의 실마리, 벼리라 한 것이다. 6조 혜능 선사의 제자인 영가(永嘉) 스님이 지은 <증도가(證道歌)>의 한 구절 역시 같은 맥락이다.


一月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이쯤에서 화두 하나를 꺼내보자. 한 스님이 다가와 조주 화상에게 물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화상 왈,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무심한 조주 화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