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묻는다 :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萬法歸一 一歸何所處)
답한다 :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을 한 벌 해 입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 나갔다.
(我在靑州 作一領布杉 重七斤)
‘萬法歸一’ 이라는 話頭는 선장(禪匠) 趙州宗心禪師와 한 중의 이러한 問答에서 나왔다. ‘萬物의 뿌리는 하나(萬物一體)’라는 東亞細亞인들의 천명관을(天命觀)을 잘 드러낸 話頭이다. 이 話頭는 近代 韓國佛敎 中興祖인 경허禪師가 19세 때 들었던 공안(公案)이기도 하다. 質問은 存在의 根源이 무엇이냐는 매우 哲學的이고 深奧한 疑問을 提起하고 있다. “萬法‘은 肯定. 差別. 有. 現象. 諸法實相. 방행(放行)의 絶對現實을, ’하나‘는 不正. 平等. 無. 本體. 諸法無我. 파주(把住)의 일체공(一切空)을 뜻한다. 放行과 把住는 各各 肯定과 差別, 不正과 平等을 意味하는 禪學用語다.
答의 核心은 ‘적삼’과 ‘일곱 근’이다. 베적삼은 누구의 것이든 그 옷감(재질)이나 외형에선 똑같다. 그렇지만 體軀에 따라 裁斷하는데 드는 옷감은 다섯 근, 여섯 근, 일곱 근 등으로 각각 달라진다. ‘일곱’은 本體와 구분된 現象, 하나에 비해 많은 것. 平等에 대한 差別을 나타낸다. 禪學에서는 이를 無分別(베적삼)의 分別(일곱 근). 平等속의 差別. 差別속의 平等이라고 한다. 그 긍극적인 指向點은 生死一如, 즉 모든 差別과 對立의 消滅이다. 差別과 平等이 對立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空間, 이것이 옷으로 보면 ‘平等’, 무게로 보면 ‘差別’인 베적삼이다.
萬法歸一을 쉬운 예를 들어 說明하여 보자. 한 家庭主婦가 보자기를 들고 장을 보러 간다. 콩나물, 두부, 파, 가지 등을 사니 각각의 비닐 봉지에 넣어 준다. 主婦는 이 각각의 봉지들을 보자기에 묶어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主婦의 시장보따리는 겉으로만 보면 하나다. 그러나 풀어헤치면 콩나물봉지, 두부봉지 등 여러 개다. 이것이 바로 萬法이 하나고, 하나가 萬法인 道理다. 森羅萬象의 存在現象도 이와 같다. 모든 것을 ‘平等’이라는 큰 보자기에로 싸버리면 높은 사람, 낮은 사람도 없고, 富者도 가난뱅이도 없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貴賤, 上下 등 무수한 相對的 差別이 마치 主婦의 장보따리 속 콩나물봉지, 두부봉지처럼 우글거리고 있다.
禪은 이 같은 萬物一體 思想의 具體的 實踐方法으로 몰아 統一的 純粹經驗을 提示한다. 바로 꽃을 볼 때에는 꽃이 되고 물고기를 볼 때는 물고기가 되는 自己와 對象의 ‘渾然一體‘다. 이것이 自身을 비워 對象과 하나가 되는 物我의 統一이다. 禪은 槪念과 論理를 拒否하고 對象 自體로 바로 들어가 그 內部에서 있는 그대로의 事物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곧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것이다.
꽃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가 꽃이 되어 꽃처럼 비를 맞고 햇빛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꽃이 나에게 對話를 하고 나는 그 꽃의 모든 神秘와 기쁨. 괴로움을 알게 된다. ‘‘萬物은 한 根源’이라는 觀點에 서면 生死의 對立이 있을 수 없다. 人間 宿命 가운데 가장 치열한 難關인 生死 問題도 이렇게 한 마디로 끝내는 것이 禪이다.
‘萬法歸一’을 다룬 趙州의 다른 禪問答을 살펴보자.
묻는다 : 한 줄기 빛이 수십만 갈래로 갈라진다면 이 한 줄기 빛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답한다 : (趙州는 아무 말 없이 짚신 한 짝을 벗어 던진다)
質問은 역시 ‘만법귀일(萬法歸一)‘과 같은 脈絡의 哲學的 問題다. 그러나 趙州의 답은 ’萬法歸一‘ 때보다 훨씬 더 當惑스럽다. ‘趙州拓鞋’라는 이 話頭는 짚신을 벗어 던진 데 焦點이 있다. 質問者는 하나와 많은 것을 區分하고 오고 가는 것을 分別하는 잘못된 旣成의 論理的 思考에 빠져 있다. 質問者의 槪念과 論理는 禪이 要求하는 참된 실재(實在)와는 無關한 人間造作의 産物이다. 그래서 趙州는 그 따위 質問은 아무 意味도 없다고 對答한다. 마치 짚신을 벗어 던진 것이 無意味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禪은 이러한 ‘無意味’ 속에서 意味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무(無)는 유(有)의 어머니가 된다. 즉 禪은 手段(直觀力)에 의해서만 把握할 수 있지 槪念化로 묶는 制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짚신을 벗어 던진 意味다. 있는 그대로를 보아라, 빛이 여러 갈래일 때는 여러 갈래로, 한 줄기일 때에는 한 줄기로만 보면 된다. 公利的 論理는 直觀을 妨害할 뿐이다. 禪은 우리가 旣存의 觀念으로 事物을 바라보는 걸 막기 위해 奇行. 逆說. 矛盾. 난센스 등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禪師가 使用하는 言語나 行動은 槪念性을 갖지 않는 一種의 부르짖음이며 感歎이다.
짚신도 두 짝이 아닌 한 짝에 주의해야 한다. 봐라! 하나(짚신 한짝)가 어디서 비롯되었고, 또 하나가 어디로 가는지를, 짚신이 떨어지는 곳(現實 속의 一介 地點. 數十萬 갈래의 빛)이나 온 곳(趙州의 발. 빛이 온 곳)이 무슨 意味가 있단 말이냐. 짚신(빛)은 그대로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네 質問은 觀念的이고 理論的일뿐인 헛소리가 아니냐. 그의 不條理한 行動은 실제 있던 그대로의 世界를 보여주는 한 소식이다. 이러한 問題를 理解하는데는 知性이란 아무 쓸데가 없다. 오직 새로운 제3의 눈,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禪的 方法으로서만 可能하다.
趙州의 語錄에는 ‘萬法歸一’의 問題를 다룬 問答이 3개나 나온다. 또 하나의 問答은 이렇다.
문 : 모든 存在의 根源은 무엇입니까.
답 : 용마루와 대들보, 서까래, 기둥이다.
문 : 저는 모르겠습니다.
답 : 두공(枓栱)이 차수(叉手)를 하고 있는데 자네가 모르고 있는 거야.
이 問答 역시 萬法의 根源은 萬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有, 無라는 觀念에 사로잡힌 간택(揀擇)이 된다. 趙州는 눈에 보이는 現實의 事物을 곧바로 提示함으로서 이같은 揀擇의 딜레마를 脫出한다. 趙州는 기둥 위에서 대들보를 받쳐주는 보조 나무토막 두공(一名 玉露)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敬虔한 禮法의 姿勢(叉手)로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옥로는 대들보, 기둥과 함께 집을 지탱하는 ‘萬法’의 하나다. 이처럼 差別相(기둥, 석가래. 두공)속에서 平等相(집)을 터득하는 것이 禪의 妙諦라는 이야기다.
萬法은 공(空)일 뿐이기에 그 絶對無가 바로 萬法의 根源이 된다. 平等과 差別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禪이 자리하는 곳이다. 禪은 ‘예’ 와 ‘아니오’, 하나와 많은 것을 西洋的 二分法으로 兩斷하지 않고 자재롭게 넘나든다. 이는 東洋式 男女 愛情 表現이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을 때 내심은 ‘예’이면서 겉으론 ‘아니오’를 답하는 것과도 相通한다.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묻는다 : 오랫동안 趙州의 돌다리를 그리워했습니다만 막상 와서 보니 그저 통나무다리가 보일 뿐입니다.
답한다 : 너는 다만 통나무다리를 보았을 뿐, 아직도 趙州의 돌다리는 못 보고 있구나!
묻는다 : 그 조주석교(趙州石橋)란 어떤 것입니까?
답한다 : 당나귀도 말도 건네준다.
‘趙州石橋’ 라는 이 古佛 趙州의 禪은 사람은 물론 당나귀, 말까지를 包含한 일체 衆生을 濟度하고 解脫시키는 偉大한 道力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一體 衆生은 모두 佛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趙州禪門에 들어오면 누구나 解脫을 얻을 수 있고 成佛할 수 있다는 것이다. 衆生이 곧 부처라는 ‘涅槃經’의 一體衆生悉有佛性을 멋지게 說破한 趙州의 구순피선(口脣皮禪)이다. 이러한 ‘涅槃經’의 불성론(佛性論)은 萬民平等思想의 源泉이다. 禪學은 萬民平等 대신 ‘絶對平等’이라는 用語를 즐겨 使用한다.
禪이 强調하는 絶對平等은 共産主義式의 無條件的 平等이 아니다. 누구나 佛性을 소유하고 있다는 側面에서 平等할 뿐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側面에서 平等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可能性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깨우침이라는 過程을 통해서만 비로소 實現된다. 그래서 깨우치면 부처, 못 깨우치면 凡夫라는 現象界의 差別性이 엄연히 存在하게 된다.
森羅萬象이 演出하는 現象界의 世俗的 現實은 거슬러 올라가면 ‘本體’라는 하나의 뿌리로 歸結된다. 그렇다고 現象界를 一考의 價値도 없는 虛像일 뿐이라고 無條件 否定하면서 絶代平等만 主張하는 것은 禪이 아니다. 다만 本體와 現象이 一體라는 原理만 깨달으면 現象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도 眞理로 收用할 수 있다는 것이 禪思想의 本質이다. 이것이 바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山是山 水是水)이라는 雲門文偃禪師(864-949)의 話頭가 뜻하는 宇宙肯定이요, 現實肯定이다.
話頭 ‘趙州石橋’는 어떤 것이냐는 學僧의 두 번째 물음에 ‘건너갔다 오너라. 건너갔다 오너라’(過來 過來) 하고 對答한다. 過來 過來는 ‘빨리 그 다리를 건너오너라’는 애기다. 잔소리 말고 공부(參禪修行)나 빨리하라는 叱責이 內包되어 있다.
조동종을 開昌한 동산양개와 조산본적선사가 開發한 ‘조동오위’ 라는 存在論이다. 本體와 客體의 關契를 說明한 ‘조동오위론’의 다섯 단계란 다음과 같다.
1) 정중편(正中偏) : 現象에 의해 감추어진 本體
2) 편중정(偏中正) : 本體에 接近
3) 정중래(正中來) ; 現象界로 回向
4) 겸중지(兼中至) : 煩惱와 보리의 造化
5) 겸중도(兼中到) : 造化의 中心 到達
정(正)은 본체. 어둠(暗)을 뜻하고 편(偏)은 現像, 밝음(明)을 뜻한다. 이를 圓相의 그림으로는 각각 ◉, ○, ● 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겸중지’라는 段階는 本體를 확실히 깨달은 후 世俗으로 돌아와 먹을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의 日常生活을 道의 具體的 實踐으로 펼치며 사는 解脫道人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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