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불교 2. 깊고 깊은 뜻

slowdream 2007. 8. 10. 17:27
 

* 깊고 깊은 뜻(趙州 密密意)


 묻는다 : 깊고 깊은 뜻이란 어떤 겁니까?

 답한다 : (趙州禪師는 質問을 한 比丘尼 앞으로 다가가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묻는다 : 노스님께서는 아직도 그것이 남아 있습니까?

 답한다 : 오히려 그것을 지니고 있는 건 네가 아니냐?


 ‘깊고 깊은 뜻(密密意)’ 이란 話頭는 趙州와 한 比丘尼의 이러한 禪問答에서 생겨났다. ‘요시소사(尿是小事)’처럼 成佛 非代理性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平等論을 說破한 法問이다. ‘密密意’란 釋迦牟尼가 靈山會上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加葉에게 전해준 소식, 즉 佛法의 根本(眞如,自性,道)을 말한다. 問答의 核心은 ‘그것’이다. 잘 봐야 한다. 禪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보다도 빨리 몇 만 리 날아가 버리고, 번개보다도 몇 백 배 빠르게 虛空을 지나가면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比丘尼의 ‘그것’은 形而下學的인 색정(色 情)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趙州의 ‘그것’은 形而上學的인 佛性(自性,마음)을 말하고 있다.


 德山의 방(棒), 臨濟의 할(碣:고함소리)과 함께 禪家의 3대 名物의 하나인 趙州의 ‘구순피선(口脣皮禪)’은 이처럼 한순간에 세치의 혀로 ‘形而下’를 ‘形而上’으로 끌어올리고 또 반대로 뒤집기도 한다. 出家僧에겐 男女의 境界가 없다. 趙州가 比丘尼의 어깨를 어루만짐은 곧 석가모니가 연꽃송이를 든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脫俗하지 못한 比丘尼는 텅 빈 마음으로 事物을 대할 때 손에 닿는 것 그대로가 眞實된 것이라는 ‘촉사이진(觸事而眞)’의 妙諦를 모른 채 색심(色心)이 發動해 되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趙州 古佛은 타이른다. 색(色)을 느끼는 네 마음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 : 眞如. 自性. 道)인데 정말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6祖 慧能 以後의 禪宗은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心外無佛)”는 心地法問으로 一貫해 오고 있다. 마음이 어떻게 생각을 일으키는가에 따라 比丘尼의 마음과 같이 色情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趙州와 같은 無心의 佛性이 되기도 한다. 어깨를 만져주었을 때 짜릿함을 느끼는 그 ‘마음’이 곧 佛性과 道의 바탕임을 모른 채 ‘한소식 했다는 古佛인 당신에게도 아직 色慾이 남아 있느냐’ 고 묻다니......쯧쯧!


 어느 날 또 한 比丘尼가 趙州禪師를 讖文했다.

 묻는다 : 사문이 닦아야 할 修行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한다 :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

 묻는다 : 노스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답한다 : 내가 만일 너와 關係했다 하더라도 너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다.


 讖問한 比丘尼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趙州의 대답에 ‘趙州, 나는 지금 당신까지도 포함한 전 寺門의 修行할 바를 물은 것’ 이라고 反縛하고 나섰다. 이것이 ‘노스님과는 相關없는 일’ 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이다. 趙州의 對答은 너는 이 趙州에 의해서는 새로운 生命, 즉 成佛을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話頭로는 ‘막생아(莫生兒 : 애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라 한다.


 成佛이라는 새로운 生命의 誕生은 ‘自身의 努力’ 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아이를 낳듯 누구와 關係를 가져서, 修行을 해서 이루는 일이 아니라는 峻嚴한 타이름이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것이 禪家의 絶對 禁忌이듯이 깨우침을 자신 밖으로부터 얻으려고 가르침을 구하고 修行을 하는 것도 역시 ‘禁忌’ 라는 애기다. 이것이 바로 깨우침은 修行을 通해 얻는 게 아니고, 한마디 말에 문득 自身의 本體를 發見해야 하는 것이라는 南宗 頓悟思想의 도불용수론(道不用修論)이다.

 

禪은 000과 宇宙意識의 本質的인 構造를 파헤치는 作業이다. 이를 위해 禪은 우선 旣存의 思惟體系를 단호히 拒否한다. 觀念的인 推論이나 理論的인 分析, 0000 지식, 낡은 慣習, 高低. 長短. 貴賤. 凡聖등의 二分法的인 分別心 같은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라고 한다. 오직 直觀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마치 뒤에 깔린 意味를 찾지 않고 그림이나 詩를 그대로 보고 읽는 것과 같은 實在 觀察만이 禪的인 認識이다. 禪은 한마디로 主觀的 唯心論의 最高峰이라고 할 수 있다.

 

禪은 分別心과 사량계교(思量計較)를 버리고 實存的 體驗을 通해 얻어지는 歸納的 方法의 認識體系를 樹立하고자 한다. 禪이 目標하는 認識體系의 出發點은 無心이다. 따라서 오직 無心 하나밖에 없다. 個人的인 人格과 宇宙 全體性이 훌륭하게 一致할 때 意識的 人格과 無意識的인 人格간에 葛藤은 解消된다. 이것이 바로 健全한 心的 存在方式이며 現代 全身 治療法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禪은 現代 精神分析學과 一致한다. 그래서 現代 精神分析學은 治療法에 禪을 널리 活用하고 있다. 話頭는 無意識이 意識을 侵攻하도록 해 固定된 틀에 묶여 있는 우리의 意識을 解放시킨다. 이같이 急激한 意識變換으로 惹起된 ‘自身의 變革’ 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禪問答이다.


* 춘성(春城)禪師(1891~1977)


 “오늘은 陸永修菩薩이 지어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보지 속에서 나온 날이다.“


 韓國佛敎 曹溪宗 춘성(春城)禪師(1891~1977)가 朴正熙 大統領 婦人 陸永修 여사 생일날 설해 준 禪法問의 序頭이자 말후구다. 法席을 메운 高官 大爵의 婦人들이 얼굴을 파묻을 쥐구멍을 찾느라 허둥댔다. 生日祝賀에 겨우 辱만 한 바가지 퍼 먹게 한 ‘不敬罪’를 저지른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禪이 자리하는 곳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의 出生을 이보다 더 事實的으로 描寫할 수는 없다. 地位가 높건 낮건, 돈이 있건 없건 누구나 태어날 때는 똑같이 으앙하고 울고, 이 세상을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것이다. 佛性이 萬有에 고르게 偏在해 있듯이 萬人이 平等하다.


 그 逸話를 몇 개 더 紹介해 보자. 어떤 女大生에게 들려준 法門이다.

 “내 그 큰 것이 어찌 네 좁은 데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뭐,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나는 여태껏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내 자지밖에 못 봤어“


차나 마셔라(喫茶去)


 묻는다 : 전에 여기 와본 일이 있는가?

 답한다 : 예, 온 적이 있습니다.

 묻는다 : 끽다거(喫茶去 : 차나 마셔라)

 묻는다 : 전에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답한다 : 처음입니다.

 묻는다 : 끽다거(喫茶去 : 차나 마셔라)


 趙州의 核心 思想은 한마디로 말해 日常生活이 곧 眞理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다. 禪은 우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심즉불(心卽佛)‘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돈을 貪하고 色을 밝히는 마음도 佛心일까. 아니다, 心卽佛의 ‘心’은 宇宙攝理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平凡한 日常生活을 이끄는 本來의 素朴하고 純粹한 마음. ‘나’ 라는 存在를 支撐해 주는 根源的인 마음을 말한다. 가령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불을 쬐는 마음이 根源的인 마음이다. 이런 밑바탕의 마음을 平常心이라고 한다. “平常心是道”야말로 祖師禪의 核心思想이다.


 平常心是道를 說破한 사람은 馬祖道一禪師다. 그래서인지 趙州의 話頭 중에는 平常心을 說破한 話頭가 가장 많다. 代表的인 예가 ‘차나 마셔라(喫茶去)’ ‘뜰앞의 측백나무(庭前柏樹子)’ ‘밥그릇이나 닦아라(洗鉢盂去)’ 같은 것들이다..


 어느날 趙州 종심禪師에게 두 명의 衲僧이 찾아왔다. 趙州가 그들에게 똑같이 質問을 던졌다. 한 사람은 와봤고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趙州는 두 사람에게 한결같이 ‘茶나 마셔라’고 일렀다.

 옆에 있던 원주가 異常하다고 생각되어 물었다.

 원 주 : 왜 와본 사람이나 처음 왔다는 사람이나 다같이 ‘茶나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 주 : 원주!

 원 주 : 예

 조 주 : 끽다거(喫茶去)!


 이상이 ‘喫茶去’라는 有名한 話頭가 생겨난 기연(機緣 : 學人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機會와 因緣)이다. ‘喫茶去’는 祖師禪의 核心思想인 日常生活이 곧 道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만물일체(萬物一體)思想을 代表하는 話頭의 하나다. 禪院에 入門者가 오면 禪師가 通常 던지는 質問中의 하나로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등의 물음과 같은 것이다. 이 質問은 單純한 空間的 地理的 方向이나 旅程을 묻는 것이 아니다. 人間이라는 存在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深奧한 意味를 內包한 質問이다.

 

趙州가 세 사람 모두에게 ‘茶나 마시라’고 한 뜻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自己自身에게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禪의 모든 問題는 내면자증(內面自證)으로 歸結된다. 깨달음이니 成佛이니 하는 理想은 물론 日常生活 속의 行爲와 判斷 등 모든 思考와 行動을 마음, 즉 內面을 통해 省察하고 그 結果로 얻어지는 良心에 따르라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면 對答하고, 사람이 오면 茶를 나누어 마시는 日常事가 삼매(三昧)인 禪이며, 佛法이고 道다. 이러한 日常事를 온갖 雜念과 拘束을 벗어난 無心한 境地에서 行하면 그것이 곧 解脫이고 깨달음이다.

 茶를 媒介로 한 禪問答은 수없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한 중이 曺洞宗 開創者인 洞山 良价禪師(807-869)를 讖問했다.

 묻는다 : 어디서 왔는가.

 답한다 : 西天에서 왔습니다.

 묻는다 : 언제 西天을 떠났는가?

 답한다 : 供養 뒤에 떠났습니다.

 묻는다 : 너무 더디군!

 답한다 : 산과 물을 구경하느라 그랬습니다.

 묻는다 :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

 [중이 앞으로 나가 叉手(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굽히는 공손한 절)하고 섰다]

 묻는다 : [洞山은 허리를 굽혀 읍(揖)하고는 말했다] 茶나 마셔라!


 趙州의 ‘喫茶去’와 같은 意味를 갖는 禪問答이다. 洞山도 西天(方位上으론 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禪에서는 黎元, 眞理 등을 象徵한다)을 들먹이며 叉手(如如한 自性本體의 象徵)하는 등의 觀念的 眞理를 집어치우고 茶를 마시는 日常속의 道를 實現하라고 가르친다.


 潙仰宗 開山祖의 한사람인 仰山慧寂禪師(807-883)와 삼성혜연(臨濟義玄禪師의 法師)의 問答도 茶를 마시는 無心의 境地를 일깨운다.

 묻는다 : 네 이름이 뭐냐?

 답한다 : 혜적(慧寂)입니다.

 묻는다 : 慧는 무엇이고, 寂은 무엇이냐?

 답한다 : 바로 스님 앞에 있습니다.

 묻는다 : 아직도 거기에는 앞과 뒤가 있구나!

 답한다 : 앞뒤의 문제는 이만 젖혀놓겠습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묻는다 : 茶나 한잔 마셔라.


 仰山이 묻고 삼성이 답한 禪問答이다. 仰山이 ‘너라는 存在는 대체 뭐냐'라고 물었다. 삼성은 자기 이름 대신 仰山의 法名을 내세워 逆攻으로 들어갔다. 慧寂은 글자대로는 모든 것을 超越한 智慧의 平和스러움을 뜻한다. 나도 당신의 法名이 뜻하는 것처럼 한 소식한 成佛의 境地라는 뻐김이다. 仰山이 慧와 寂의 뜻을 물은 것은 禪의 理解정도를 探知하기 위한 反問이며 다시 한 번 걸고 들어간 攻擊이다. 삼성의 ’바로 스님 앞에 있다‘는 대답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알아준다는 反擊이다. 역시 自慢스럽다. 그러자 仰山은 앞과 뒤를 分別하는 分別意識을 責望한다. 禪에서 가장 禁忌是하는 前後. 左右. 生死. 凡聖으로 나누어 二分法的인 思量 分別心을 發動한 데 대해 가차없이 一擊을 가한 것이다.

 

삼성은 더 觀念的인 것으로 뛰어 올라가 ‘스님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는 앞과 뒤가 끊어진 자리, 즉 무여열반(無余涅槃)의 境地에서 본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禪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버리면 哲學이 되어 버리고, 觀念이 되어 버린다. 禪은 이쯤에서 일대의 轉換을 해야 한다.

 

그래서 仰山은 마지막 한 방을 내리치고 만다. ‘茶나 마셔라.’ 이눔아, 空然한 觀念的 遊戱나 일삼지 말고 삶 그 自體로 돌아가 日常속의 眞理를 살펴라! ‘냉수 먹고 속 차리라’ ‘삶 그 自體로 돌아가라’는 애기다. 이게 禪이다. 茶를 마시는 데는 더 以上의 論爭과 討論이 필요없다. 그저 흐믓한 마음으로 한 잔의 茶를 마실 수만 있다면 그 앞과 뒤가 없는 것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哲學的 물음을 가늠하는 答인 것이다.


 禪은 오직 우리가 생생하게 存在하고 있다는 事實을 또렷이 意識할 수 있는 確實한 經驗을 가지라고만 要求한다. 이는 生과 死를 하나로 보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바탕을 體得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現存이 永遠이고 過去이고 未來라는 마음가짐이면 된다는 이야기다. 禪學的으로는 이를 ‘頓悟’라 한다. 魏秦南北祖時代의 축도생으로부터 비롯된 頓悟思想은 中國人들의 傳統思想인 만물일여(萬物一如)思想과 전체작용설(全體作用設)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서로 道伴 사이이며 一世를 風味한 禪杖들인 운암담성과 天皇道悟의 茶이야기는 한층 深奧하다.

 어느날 운암이 茶를 끓이고 있는데 天皇이 法談을 했다.

 천 황 : 누구한테 주려고 茶를 끓이나?

 운 암 : 마시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 있네.

 천 황 : 어째서 그 사람 스스로 끓여 마시게 하지 않는가?

 운 암 : 多幸이 내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른바 法身과 現身의 關係를 거량한 수준 높은 禪門答이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日常의 對話이다. 그러나 이 對話 속에는 유현(幽玄)한 선기(禪機)가 번득인다. ‘茶를 마시고 싶어하는 한 사람’은 바로 存在의 本質인 本體自性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는 茶를 끓일 수도 없고, 끓여서도 안 되는 사람이다. 또 그가 茶를 마시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本體自性’이 茶를 마시는 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도 成立이 안 된다. 또 茶란 그 사람만이 마실 수 있는 專賣 特許品도 아니다.


 天皇이 왜 그 사람에게 직접 끓여 마시게 하지 않느냐고 追窮한건 觀念 속의 本體自性을 具體化시켜 肉眼으로 볼 수 있게 해보라는 反擊이다. ‘多幸히 내가 여기 있지 않은가!’ 엄청난 한마디다. 내 肉身과 나의 本體自省은 分離되어 있지 않다는 宣言이다. 基督敎적 表現을 빌린다면 육화(肉化)가 바로 ‘나’라는 애기다. 茶를 마시고 싶다는 ‘欲求’와 茶를 끓이는 ‘行爲’는 動과 不動을 區分하는 現實 속의 世界에서만 비로소 確認될 수 있다. 法身이 現實로 나타난 것이 茶를 끓이고 있는 운암이다.

 

基督敎는 이를 聖靈의 역사(役事)라 한다. (肉化한 하느님이 地上의 人間으로서 具體的 行動을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운암의 내적인 法身과 외적인 現身은 分離되지 않고 一致해 있으면서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고 凡夫의 일을 하는 道人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龍潭崇信이 스승 天皇道悟禪師의 侍奉으로 있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묻는다 : 제가 入室한 이래 심요(心要)의 가르침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답한다 : 네가 들어온 날부터 나는 너에게 잠시도 가르침을 그친 일이 없는데....

 묻는다 : 어떤 점에서 저를 가르쳐주셨다고 하십니까?

 답한다 : 네가 茶를 가져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오면 먹었고, 禮를 표하면 答禮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떤 점에서 내가 마음 本質을 너에게 보이기를 疎忽히 했단 말이냐?

 

龍潭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天皇이 한소식 전해주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當場에 깨닫는 것이다. 思惟하고 反省하기 시작하면 놓쳐버리고 만다."

 龍潭이 언하(言下)에 깨닫고 깨달음을 어떻게 補任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天皇은 이렇게 일렀다.


“너의 자성(自性)이 悠悠自適하도록 하라. 完全히 自由로워야 하고, 어떤 執着도 말아야 하며, 環境이 要求하는 대로 行動하라. ‘平常心’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 외 달리 거룩한 깨달음이란 없느니라.”


 雲門宗. 法眼宗의 法脈 原流인 雪峰義存禪師(822-908)와 한 중의 問答도 ‘喫茶去’를 통한 日常生活의 眞理를 일깨우고 있다.

 묻는다 : 장님은 어떻게 세월을 보냅니까?

 답한다 : 차나 마시고, 밥이나 먹어라.


 여기서도 ‘喫茶去’라는 具體的이고 日常的인 예에 逆說的으로 高次元的 意味를 附與해 佛法을 說明하고 있다.


長慶慧陵(854-932)과 보복종전(867-928)의 거량을 보자. 長慶이 어느날 보복에게 시비를 걸고 들어갔다.

 묻는다 : 如來에게는 方便과 眞理란, 두 가지 말이 없다. 如來도 일자불설(一字佛說)은 아니다. 오직 두 가지 말이 없을 뿐이지 않는가?

 답한다 : 그럼 如來의 말이란 어떤 건가?

 묻는다 : 너 같은 귀머거리는 얘기해 줘도 알아듣지 못할게다.

 답한다 :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걸 보니 如來의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묻는다 : 그럼 如來의 말이 무엇인가?

 답한다 : 茶나 마시게.


 한마디로 長慶은 무사선(無事禪 : 死禪)인 반면 보복은 유처유불(有處有佛)의 경지인 동선(動禪)이다. ‘장경불어(長慶佛語)’라는 이 話頭는 佛法이니, 見性이니 하는 觀念的 涅槃世界를 버리고 茶를 마시는 日常 속에서 마음의 安定을 얻으면 極樂이요 解脫이라는 얘기다. ‘覺性’을 뜻하는 茶는 日常事를 통해서 깊은 內面의 省察을 이끄는 牽引車 役割을 한다.


 절강성 천태산에 운봉지덕이라는 한 소식한 禪師가 살고 있었다. 청할과 충후라는 두 長老가 그의 名聲을 듣고 찾아갔다. 운봉은 마침 떨어진 알밤을 줍고 있었다.

 묻는다 : 道를 닦는 벗이여, 庵主는 어디 계시는가?

 답한다 : 어디서 오셨습니까?

 묻는다 : 산 밑에서 왔소.

 답한다 :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소?

 묻는다 : 여기가 어디오?

 답한다 : (운봉대사가 읍을 하면서) 가서 차나 마시지요.


 이때의 ‘茶나 한잔 하자’는 말은 單純한 人事致禮의 接待가 아니다. 우리 茶를 통해 얻은 覺性의 정도를 한번 겨뤄 보자는 法談의 對決을 뜻한다. 禪家에서는 茶 한 잔에 宇宙가 녹아들고 빗물처럼 흐르는 俗世 思念의 意識이 말끔히 씻긴다.


 禪語錄에 登場하는 茶는 江南地域에서 나는 綠茶를 말한다. 平常心을 따르는 日常生活의 代表的 事例인 ‘喫茶去'는 급기야 宋代 臨濟宗 園悟克勤禪師(1063-1135)에 이르러 다선일치(茶禪一致)라는 하나의 禪林傳統으로 굳어진다. 禪家에서는 禪과 같은 比重을 갖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園悟克勤의 다선일치(茶禪一致)와 더불어 百丈懷海의 농선일치(農禪一致). 崇山 少林寺를 中心으로 僧侶에게 武術을 勸獎하는 권선일치(拳禪一致)가 그것이다. 禪林의 3사일치(三事一致)라고나 할까.


 園悟는 湖南省 협산사에 主席하면서 저 유명한 ‘碧巖錄’을 썼다. 園悟는 碧巖川 옆의 바위동굴에서 碧巖川 물로 茶를 다려 마시며 이 책을 執筆했다. 그는 佛敎硏究가 차 맛에 深趣하는 다도(茶道)에 比例해 日就月將하고 佛法의 理解와 차 맛을 느끼는 境地가 서로 같은 境界에 이름을 스스로 讚嘆했다. 禪家의 차(茶)는 곧 ‘깨달음’을 象徵한다. 茶를 달이고 잔에 따르는 行爲가 바로 선정(禪定)이고 如如한 佛法의 체현(體現)이다. 山寺의 綠茶 한 잔이 갖는 意味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佛法’이며 日常 속에서 光明을 發하고 있는 具體的 道의 현현이다

 

韓國 禪宗에서 ‘茶禪一致’의 境地를 代表하는 초의의순선사(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은 茶를 마셔 마음을 깨이게 하는 청한심성(靑寒心醒)을 이렇게 노래한다.


 대숲 소리 솔 물결 모두 다 서늘하니,

 맑고도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흰 구름 밝은 달만 두 손님 되라 하니,

 도인의 자리에는 이것(茶)이면 훌륭하네.


 茶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은 草衣禪師를 한없는 ‘낙도(樂道)의 世界에서 노닐게 하고 있다. 솔바람 들으며 호젓이 茶를 마시는 閑暇함은 어떠한 財閥의 好事보다도, 天下를 號令하는 帝王의 滿足보다도 더 높고 貴한 價値를 지닌다. 茶 한잔의 意味가 天下를 制覇하는 ‘속절없음’이라고나 할까.

 禪語錄에 ‘날마다 쓰면서 알지 못한다(日用而不知)’는 말이 있다. 이는 원래 周易에서 나온 말인데, 人間 누구나가 本來 가지고 있는 自己의 平常心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道의 本質이요 主體임을 알지 못하고 道나 佛法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함을 指摘한 것이다.


 묻는다 : 어떤 것이 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

 답한다 : 뜰 앞의 측백나무다(庭前柏樹子).


 참으로 엉뚱하기 짝이 없다. 達磨가 印度에서 中國으로 와서 傳播하려 한 佛法의 眞理가 무엇이냐는 形而上學的인 높고 높은 물음에 겨우 절 마당의 측백나무라고 對答을 하다니. 趙州의 ‘庭前柏樹子’는 眞理에 到達하려면 論理로 따지는 相對的 知慧나 分別心을 버리고 日常生活을 이끄는 根源的인 마음, 곧 平常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平常心이란 萬法의 根源인 때묻지 않은 淸淨한 마음을 말한다.


 봄에 새잎 나고 가을에 落葉 지는 宇宙自然의 攝理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배고프면 밥 먹는 眞理야말로 眞正한 佛法의 實踐이요 불도(佛道)의 현현이다. ‘庭前柏樹子’는 이같은 눈앞의 現實을 直觀的으로 通察, 佛法의 根本을 體得하라는 가르침이다.


밥그릇이나 씻어라!(洗鉢盂去)


 趙州는 또 어느날 한 學人이 찾아와 佛法을 가르쳐달라고 哀怨하자 다음과 같이 平常心이 바로 佛法임을 일깨워주었다.

 조 주 : 아침은 먹었는가?

 학 인 : 예, 먹었습니다.

 조 주 : 그러면 밥그릇이나 씻어라(洗鉢盂去)


 밥을 먹고 나서 밥그릇을 씻는 日常의 行爲(平常心)가 바로 道의 實踐이다. 밥을 먹었으니 무심히 밥그릇을 닦는 素朴하면서도 根源的인 平常心속에는 어떠한 造作도 分別心도 없다.  ‘세발우거(洗鉢盂去)’라는 이 話頭가 意味하는 것은 自己라는 存在를 意識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鉢盂(승려들의 밥그릇)를 씻는 眞實된 平素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바로 無心이고 見性이다. 莊者가 “道는 가장 賤視되는 오줌과 똥 속에도 있다”고 喝破한 것과 같은 脈絡이다. 밥그릇을 닦는 하찮은 일에도 도(道)는 內在한다. 趙州의 ‘庭前柏樹子’와 ‘洗鉢盂去’는 現實을 直視하라는 禪思想의 核心을 일깨운 懇曲한 가르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