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의 글은 오래전 인터넷에서 서핑하다 길어온 글로,
2003년에 입적한 서옹 스님의 법문집인 듯싶습니다.
출처는 확실치 않습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蕭湛 拜
禪佛敎
禪佛敎: 宗敎的으로는 禪佛敎 또는 禪宗, 思想的으로는 禪思想, 學問的으로는 禪學이라고 불리는 禪은 다른 思想이나 宗敎와는 確然히 구분되는 特徵的인 革命性, 實踐性, 日常性, 直觀性, 單純性등을 갖고 있다. 中國의 禪佛敎는 이미 1천5백 년 전에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흐르고 있다(橋流水下流)” “산이 물위로 걸어간다(東山水上行)는 엄청난 轉換을 드러내 보인다. 말하자면 人間의 旣存 思惟體系를 뒤엎는 一代의 意識 革命이다.
禪은 한마디로 마음공부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이 地上이 極樂이 될 수도 있고 苦海가 될 수도 있다. 禪佛敎는 發生부터가 長安과 洛陽을 中心으로 한 制度佛敎에 對抗하는 地方佛敎, 皇室中心의 貴族佛敎에 대한 民衆佛敎, 觀念佛敎에 대한 實踐. 生活佛敎라는 胎生的 屬性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온 地球가 變化와 改革의 목소리로 들끓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21世紀 以後의 文明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고서는 人類의 生存을 더 이상 支撐하기 어렵다는 絶叫다. 우리는 지금 20世紀 패러다임들이 急激히 바뀌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目擊하고 있다. “發想의 轉換” “改革” “構造改編“ ”리엔지니어링“ ”벤치마킹” 등이 이러한 變化를 代表하는 오늘의 話頭이다. 具體的으로는 “價格破壞, 流行破壞, 季節破壞” 같은 전혀 새로운 現像들이 우리 日常生活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다가오는 21世紀 이후의 千年은 文化의 世紀, 哲學의 世紀, 宗敎의 世紀, 전 新文明의 르네상스시대가 되리라고 많은 未來學者들과 知性들은 豫測하고 있다. 變化와 改革, 새로운 文明의 展開에는 반드시 그 밑받침이 되는 “思想”이 있어야 한다. 이는 누구도 否認할 수 없는 歷史의 法則이다. 西歐 知性들은 21世紀 以後 精神文明의 르네상스를 이끌 代案 思想을 이미 2次大戰이 끝나면서부터 東洋에서 찾으려는 探索을 거듭해 왔다. 西歐 合理主義 思想을 대신해 21世紀 以後의 새로운 精神文明을 이끌 代案思想으로 禪思想과 老莊思想이 가장 有力視되고 있다. 특히 老莊을 어머니로 하고 佛敎를 아버지로 해 태어난 中國 禪佛敎가 强調하는 發想의 轉換과 意識構造의 改革은 오늘의 時流에 딱 맞는다.
禪思想의 核心은 直觀的 通察이다. 禪은 모든 事物과 現像을 있는 대로 바라보는 直觀力을 깨달음에 이르는 사로(思路)의 要諦라고 누누이 强調한다. 따라서 禪에서는 理論的인 分析이나 長短, 高低, 黑白으로 分別하는 二分法的인 分別心을 斷乎히 排擊한다. 禪의 核心인 直觀力은 感受性이다. 最近 脚光을 받는 情報産業에서 가장 重視되는 基本的인 要素가 바로 感受性이다. 在日僑胞 송정의 日本 소프트 뱅크 社長은 “情報革命에는 아이디어와 感受性이 武器”라고 말한바 있다. 創意性과 感受性은 禪佛敎가 거듭 强調해 온 禪思想의 基本的 本質이다. 禪思想의 核心인 單純性, 直觀性, 日常性, 革命性(改革性)등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必要로 하는 精神的, 産業的 寶庫가 아닐까 생각한다.
世界的인 精神分析學者 칼 구스타프 융은 禪佛敎에 대한 期待를 다음과 같이 披瀝한바 있다. “禪師들이야말로 안개에 쌓인 不確實한 未來를 지켜주고 있는 산꼭대기의 횃불이다”라고 말하였다.
* 천하조주(天下趙州)
묻는다 : 어디서 왔느냐?
답한다 : 서상원(瑞祥院)에서 왔습니다.
묻는다 : 그렇다면 그 상서(祥瑞)로운 佛像의 모습을 보았는가?
답한다 : 瑞祥은 보지 못했고 누워 졸고 있는 부처를 보았을 뿐입니다.
묻는다 :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沙彌)냐, 아니면 주인이 없는 사미냐?
답한다 : 주인(스승)은 분명히 있습니다.
묻는다 : 네 스승이 누구냐?
답한다 : [남전(南泉)에게 절을 올리며] 겨울이 깊고 날씨가 춥사온데 그간 평안(平安)하셨습니까?
소년 趙州가 남전보원선사(南泉普願禪師.748-834)를 찾아갔을 때 주고받은 선문답이다. 화두로는 “유주사미(有主沙彌)”라 한다. 화두의 원래 명칭은 공안(公案)이다. 화두는 선문답의 제목이다. 선림(禪林) 최초 공안은 육조 혜능(慧能) 조사(638~713)와 명상좌(明上座)의 선문답에서 비롯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다.
六祖가 “禪의 根本要旨가 무엇이냐”는 明上座의 質問을 받고 “네 마음이 善과 惡이라는 二元論에 물들지 않은, 네가 父母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原初的 모습은 무엇인가”하고 反問하였다. 六祖의 反問은 明上座에게 內面的 自我를 만나볼 것을 促求한 것이다.
話頭의 重要性을 맨 처음 强調한 사람은 黃檗希運禪師(?~850)다. 그 후 臨濟宗 양기파 대혜종고선사(1086~1163)가 話頭를 드는 參禪精進을 體系化해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을 定着시켰고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趙州禪師의 名聲을 代表하는 세 가지 別名이 있다. 天下趙州, 古佛, 口脣皮禪이 그것이다. 禪宗思想 古佛이라는 別稱을 가진 사람은 趙州를 비롯해 曹溪古佛(六祖慧能), 江西古佛(馬祖道一禪師), 潙山古佛(潙山靈祐禪師), 江南古佛(중봉명본선사)이렇게 5명뿐이다. 古佛이라는 稱頌은 最上勝의 法力, 完全無缺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뜻한다. 趙州는 120세까지 살았다. 그는 스승 南泉禪師를 讖問하는 데서부터 才氣 넘치는 기봉(機鋒 : 銳利한 言動)을 發揮한다. “유주사미(有主沙彌)”라는 話頭가 보여주고 있는 少年 趙州의 선기(禪機 : 禪僧의 技倆)를 보자. 禪問答의 定型句인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은 空間的, 地理的 場所가 아니라 存在의 根源, 즉 父母로부터 태어나기 以前의 本來面目(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뜻한다. 禪問答은 하나같이 日常의 對話體를 즐겨 사용한다. 때로는 俗語, 卑語를 마구 쓰는 會話體다.
趙州가 南泉 門下에서 화롯불 當番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중들이 밭에 나가 보청(普請 : 僧侶共同作業)을 하고 있는데 절 쪽에서 “불이야! 불이야!”하고 多級하게 외치는 趙州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중들이 순식간에 禪堂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趙州는 禪堂門을 안으로 잠가버렸다. 스님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이때 南泉이 窓門 틈으로 열쇠를 던져주자, 趙州는 禪堂門을 활짝 열고 나왔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趙州救火“라고 한다. 趙州는 실제로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처럼 切迫하게 ‘불이야’를 외쳐댔을까. 이때의 불은 世俗凡夫가 휩싸여 있는 愛慾. 어리석음의 불길, 즉 解脫以前 無明의 불길을 象徵한다. 말하자면 無明의 불길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可憐한 人間의 存在를 演出한 것이다. 깨달음을 渴求하는 弟子의 외침을 感知한 스승 南泉은 果然 어떠한 지음(知音)의 解答을 주었는가. 단지 열쇠를 방안으로 넣어주었을 뿐이다. 이는 네가 갇힌 그 불길은 네 스스로 열쇠로 열고 나와야 한다는 이른바 成佛의 비대리성(非代理性)을 알려준 소식이다.
禪의 모든 問題는 이처럼 “너 자신을 알라! 는 내면자증(內面自證)으로 歸結된다. 見性이니, 成佛이니 하는 絶對自由의 獲得은 부처도 스승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깨우침은 오직 自手成家로만 이루어진다.
이류중행(異類中行)
어느날 남전보원(南泉普願)禪師가 趙州에게 말하였다.
“요즈음은 이류(異類 : 짐승)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
趙州가 물었다.
“이(異)에 대해서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類(짐승)란 어떤 것입니까?”
南泉이 두 손을 땅에 짚고 엎드려 네 발로 걸어가는 짐승 흉내를 냈다. 이때 趙州는 스승 南泉의 엉덩이를 다짜고짜 짓밟아 땅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涅槃堂(禪院의 病室)로 뛰어 들어가 외쳐댔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럽다!”
南泉이 이 소리를 듣고 侍者를 시켜 趙州가 무엇을 後悔하는지 물어보도록 했다.
趙州는 侍者에게 말했다.
“내 그를 계속해 짓밟지 않은걸 後悔한다.”
趙州가 스승인 南泉의 엉덩이를 짓밟은 行爲는 분명히 미친 사람의 行動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승에게 발길질을 한 趙州의 풍전한(風顚漢)다운 行動은 禪林에선 한 소식을 전한 ‘英雄的 行動’으로 激讚을 받는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 한다. 南泉이 提示한 ‘異類中行’은 깨달음을 成就한 大乘菩薩이라면 스스로의 涅槃에 安住하지 말고 大悲心을 일으켜 地獄道. 畜生道로 뛰어들어가 6도 輪回하고 있는 衆生을 救濟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南泉은 涅槃에 틀어박혀 있지 않다는 象徵으로 움직이는 짐승의 動作을 흉내낸 것이다. 證得한 깨달음에조차 執着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不住涅槃’을 드러내 보인 게 南泉의 짐승 흉내다.
趙州는 그런 行動도 아직 깨우침을 나타내 보이려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며 완전히 모든 걸 떨쳐버리지 못한 ‘執着’의 냄새를 풍기는 幼稚한 짓이라고 뭉개버린 것이다. 백림선사 산문기둥에는 ‘사장진제 천추탑(寺藏眞際 千秋塔)’ ‘문대조주 만리교(門對趙州 萬里橋)‘라는 7言 2句의 글귀가 새겨져 對聯하고 있다. 많이 드는 話頭는 ‘평상심이 곧 도다(平常心是道)’ ‘뜰앞의 측백나무(前庭柏樹子)’ ‘무(無)’자등 모두 趙州禪師의 것들이다.
오줌 좀 눠야겠다(尿是小事)
묻는다 : 가장 切迫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답한다 : 오줌 좀 눠야겠다. 小便은 하찮은 일이지만 나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야.
天下古佛 趙州와 한 중의 禪問答이다. ‘요시소사(尿是小事)’라는 話頭는 成佛이니 解脫이니 하는 佛敎 最高의 理想도 오직 自身의 努力에 의해서만 成就할 수 있다는 成佛 비대리성(非代理性)을 밝힌 한 소식이다.
우선 중의 물음은 禪의 3대 테제인 卽今(Now), 自處(Here), 自己(Self)중 自己를 가리킨다. 大, 小便은 아무리 貴한 사람이라도 스스로가 解決할 수밖에 없다. 解脫, 涅槃, 成佛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깨우쳐 이루지 않고 그것을 대신해 이루어질 수 있는 存在란 없다. 오줌 마려울 때의 切迫感. 그러나 그것은 絶對的으로 어찌할 도리 없이 스스로가 힘을 주어 放尿해야만 하는 것이다. 막힌 게 확 뚫리는 用便後의 快感은 누구나 맛보는 日常事다. 기막힌 眞理다.
禪은 事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흰눈은 희고 까마귀는 검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禪이 붙잡고자 하는 것은 살아 숨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그것도 가장 直接的이고 살아있는 方式으로 붙잡고자 한다.
德山宣鑑禪師(782~865)는 일찍이 다음의 獅子吼를 토한 바 있다.
“부처는 마른 오랑캐 똥 한 조각이며 聖人이란 이름도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德山의 손자뻘인 雲門文偃禪師(864~949)는 이런 自問自答을 남겼다
묻는다 : 萬法은 어디서 나오는가?
답한다 : 똥더미에서다.
(中國 祖師禪門의 장구성이라는 居士는 大便을 보려고 힘을 주는 순간 ‘아’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면서 전에 들었던 話頭를 깨쳤다고 한다.)
禪이 成就하고자 하는 目標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內在하는 思量分別의 計巧에 빠지지 않고 우리 意識으로 하여금 普遍理性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不可避하게 禪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禪의 大小便 哲學이 새삼 實感이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禪 修行이란 마음의 鎭靜한 本質을 通察해 마음이 自身의 主人이 되도록 마음자체를 訓練시키는 作業이다. 그 最終 目標는 어떠한 것에도 支配 당하지 않는 ‘絶對自由’의 獲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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