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28장.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아니하고

slowdream 2007. 8. 10. 19:00
 

<제 28장.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아니하고>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于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항상한 덕이 떠나지 않아 갓난아기로 되돌아간다. 밝음을 알면서도 어둠을 지키면 천하의 기준이 된다. 천하의 기준이 되면, 항상한 덕이 어긋나지 않아 무극으로 되돌아간다. 영예를 알면서도 굴욕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한 덕이 넉넉하여 질박한 통나무로 되돌아간다. 통나무가 쪼개지면 도구가 된다. 성인은 이를 다스리므로 지도자가 된다. 그런 까닭에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않는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于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위우무극 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위천하곡 상덕내족  복위어박)

 

  해석상 많은 오류를 빚기 쉬운 문장이다. 無를 道로 이해하면, 백이면 백 엉뚱한 길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수컷ㆍ밝음ㆍ영예가 한 짝이고, 암컷ㆍ어둠ㆍ굴욕이 그 나머지 한 짝이다. 이들은 有의 상대법을 가리킨다. 계곡ㆍ기준ㆍ골짜기는 道이다. 갓난아기ㆍ무극ㆍ통나무는 無이다. 有의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밝음과 어둠은 서로 부정하는 모순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22장에서‘성인은 하나를 품어 세상의 본보기로 삼는다’라 했듯 밝음과 어둠을 서로 부정하지 않고 함께 품으면 이는 곧 道에 순응하며 따르는 것이므로, 道의 실천적 덕목인 무위를 통해 무분별한 無로 순환한다. 순환보다는 ‘전환(轉換)’이 더 적합한 표현이겠다. 밝음과 어둠은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다. 다만 망상과 무지로 인하여 전도된 우리의 인식이 그러한 오류를 빚는 것이다.‘인식론적 전환’을 통해서 망상과 무지를 씻겨낸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有는 無로 전환하며, 이 無는 분별지인 有가 아닌 무분별지인 有이다. 현상계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우리의 인식과 관념이 제자리를 찾은 것뿐이다. 그리하여 ‘존재론적 전환’이 일어난다. 유위의 삶에서 무위의 삶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제껏 이루어진 대체적인 해석대로 無를 道로 이해하고, 또한 갓난아기ㆍ무극ㆍ통나무를 道의 비유로 받아들인다면, 道인 계곡ㆍ기준ㆍ골짜기가 역시 道인 갓난아기ㆍ무극ㆍ통나무로 돌아간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는 무게의 무게를 달고, 길이의 길이를 재겠다는 억지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道를 無라 여긴다 쳐도, 無는 有로 돌아가고 有는 無로 돌아가야만 이치에 맞다. 

 

  결론인즉, 위 문장은 결국 현상계와 그 이법인 道에 대한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緣起와 中道를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극은 <주역>의 태극을 의식하여 표현한 듯 싶은데, 여기에서 알 수 있듯 28장 또한 노자가 아닌 그 누군가가 덧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부분적으로 살을 붙였다는 학설도 있는 형편이다. 10장에서 갓난아기는 道의 비유였는데, 여기서는 無의 비유로 등장한 것도 마뜩치 않다. ‘골짜기’ 또한 道와 無, 有 등의 상징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어 이해에 어려움을 준다. 이 또한 하나의 의미에 매달리지 말라는 노파심의 일환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노자에게는 無가 있으므로 굳이 무극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정립하여 자칫 무극을 道로 여기는 혼란을 자초할 까닭이 없다. 노자의 道는 <주역>의 태극, 장자의 태허(太虛)와 다름 아니다. 송대(宋代)의 주돈이(周敦頤)와 朱子는 태극과 무극을 모두 無와 동일시하며 성리학의 토대로 삼는다.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박산즉위기 성인용지 즉위관장 고대제불할)

 

  器는 <주역>의 “형이상자가 무형의 道요, 형이하자는 유형의 器다”에서 보듯, 도구 또는 만물로 이해하면 된다. 도구는 다른 쓸모가 아니라, 바로 道의 쓸모이다. 道를 담는 그릇이랄까. ‘통나무가 쪼개지면 도구가 된다’는 無에서 有로 펼쳐진다는 의미이다. ‘樸散則爲器’를 道인 통나무를 쪼개서 有인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노자의 참뜻을 왜곡하는 것이리라. 道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道는 존재의 안감으로 질서이고 이법일 따름이다. 일테면 나비가 춤추는 것이지, 나비를 존재케 하는 道가 춤추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가 짖는 것이지, 강아지를 있게 한 道가 짖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이러한 道를 다스리므로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큰 다스림 즉 성인의 다스림은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내버려둔다. 성인은 분별하고 나누는 유위가 아니라, 무위의 덕을 실천할 따름인 것이다. 장자는“지극한 사람[성인]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다.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않으며 그저 비칠 뿐 감추지도 않는다”라 하였다. 무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