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30장. 군사가 머문 곳에는

slowdream 2007. 8. 10. 19:01
 

<제 30장. 군사가 머문 곳에는 가시밭이 돋고>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道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휘어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무력이란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작은 군사가 머문 곳에는 가시밭이 돋고, 큰 군사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흉년이 든다. 훌륭한 사람은 일을 이루면 그만두고 강함을 취하려 들지 않으며, 일을 이루고도 뽐내지 않으며, 일을 이루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고도 교만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고도 마지못해 한 것으로 여기며, 일을 이루고도 더 나아가 강대하려 하지 않는다. 만물은 지나치면 쇠하기 마련이며, 이는 道가 아닌 까닭에서이다. 道가 아니면 곧 그치고 만다.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이도좌인주자 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사지소처 형자생언 대군지후 필유흉년) 

 

  强은 곧 유위이겠다. 지나치리만큼 유위를 부정하는데, 이는 곧 그만큼 유위로 인해 삶이 곤궁해지고 피폐해진 까닭이 아니겠는가. 쉴새없는 전란과 착취로 인해 민중의 삶이 어려워진 것을 보다 못해 공자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탄식했고, 장자는 “몸이 잘린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고, 칼 쓴 죄인들이 서로 밀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묵자(墨子)는 백성들은 굶어죽고 얼어죽는데 지배계급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음을 한탄하며, 전쟁을 멈추고 호화스런 장례와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선자과이이 불감이취강 과이물긍 과이물벌 과이물교 과이부득이 과이물강 물장즉로 시위부도 부도조이)

 

  22장과 겹치는 부분이다. “스스로를 드러냄이 없으니 밝고, 스스로를 옳다 함이 없으니 빛나며, 스스로 자랑함이 없기에 공이 있고, 스스로 뽐냄이 없으니 오래 간다.”문제는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인데, 만물이 장성하면 쇠하기 마련이고, 이게 바로 道 아니겠는가. 물론 壯은 强에 다름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면 일찍 쇠하는 것’ 자체도 道에서 어긋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경>의 일부분이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함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이 좀더 매끄럽게 연결되자면 道의 자리에 무위가 있어야 한다. ‘무위가 아니므로 곧 그치고 만다(是謂不無爲 不無爲早已)’라 해야 앞뒤 문맥이 제대로 이어진다. 여하간 이 장에서는 유위의 극치와 혼란을 전쟁으로 여긴다. 전쟁은 한 인간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상 자체를 혼란과 파괴의 아수라장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상대를 불의라 무시하고 자신은 정의라 치켜세우며,‘하늘의 뜻, 정의의 실현, 난세의 영웅’이니 뭐니 하며 민중을 부추기고 결국 어느 한쪽은 그 뜻을 이루지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당송8대가(唐宋八大家)로 불리는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는 고단하고 덧없는 유위의 삶과 넉넉하고 평화로운 무위의 삶이 극명하게 서로를 비추며 드러난다. 소동파가 적벽에서 벗들과 어울려 한잔 술을 나누는데, 1천여 년 전 삼국시대에 벌어진 적벽대전을 회상하며 삶의 무상함을 토로한다. 

 

  "…… 한 벗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나는구나.> 이는 조조의 시가 아니겠는가.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과 강이 뒤엉켜 더없이 푸른데, 이곳이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끝내 곤욕을 치른 곳이 아니던가. 전투 초기에 형주(荊州)를 깨뜨리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갈제, 물살을 따라 동으로 나아감에 전선(戰船)은 천 리를 잇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네. 술잔을 든 채 강물을 굽어보고, 창을 비껴세우고 시를 읊으니 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이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대와 나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베며, 물고기와 새우를 벗하며 지낸다네.  잎사귀 같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며 하루살이 삶을 천지에 부치니, 망망한 바다에 떠 있는 좁쌀 한 알에 지나지 않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소동파 답하되,

‘벗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도다. 변하는 것으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이며,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무릇 천지간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것이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질 수 없으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담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담으면 빛이 되어, 가진다 한들 저어할 이 없고 쓴다 한들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무진장한 보물을 그대와 내가 함께 누릴 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