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得志於天下矣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勝以喪禮處之
무릇 좋은 무기라 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며 꺼리는 물건이다. 道를 섬기는 사람은 이런 물건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군자는 머무를 때 왼쪽을 귀히 여기고, 무기를 쓸 때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 군자의 도구는 아니다. 부득이 사용한다 해도 조용하고 담박하게 다루며, 이긴다 하더라도 미화하지 않는다. 승리를 미화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의 뜻을 얻을 수 없다. 길한 일은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은 오른쪽을 높인다. 부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슬픔으로 애도하는 법, 승리를 하더라도 상례로 처리한다.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부가병자 불상지기 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군자거즉귀좌 용병즉귀우 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부득이이용지 염상위상 승이불미 이미지자)
君子, 吉凶, 喪禮라는 표현과 더불어 문장의 평이함과 내용의 소박함으로 미루어, 이 장 또한 누군가 노자의 이름을 빌어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군자와 소인(小人)은 공자의 단골 메뉴인 까닭에 노자가 차용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공자에게 군자가 있다면, 노자에게는 성인이 있지 않은가. 여하간 군자와 소인의 성품에 대해서 다룬 여러 문헌들은 군자를 학문과 덕이 높고 행실이 바른, 긍정적이고 인격적인 범주로, 소인은 도량이 좁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부정적이고 비인격적인 범주로 이해한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만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恩).”
“군자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고 사람의 악한 것을 이루어 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는 반대이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이상은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나, <주역>에도 소인에 관한 표현이 나온다.
“소인은 어질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롭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득이 없으면 권하지 않고, 위엄이 아니면 다스릴 수 없다(小人 不恥不仁 不畏不義 不見利不勸 不威不懲).”
“소인은 조금 착한 일은 유익함이 없다 하여 행하지 않고, 조금 악한 일은 해로움이 없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小人 以小善爲无益而弗爲也 以小惡爲无傷而弗去也).”
중국에서는 왼쪽은 삶ㆍ하늘ㆍ남성ㆍ양(陽)의 영역, 오른쪽은 죽음ㆍ땅ㆍ여성ㆍ음(陰)의 영역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 이는 <주역>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비롯한 것으로, 하도의 선천괘는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을 뜻하며 왼쪽으로 선회하는 반면, 낙서의 후천괘는 오행의 상극(相克)을 뜻하며 오른쪽으로 선회한다. 즉, 하도는 ‘목생화ㆍ화생토ㆍ토생금ㆍ금생수ㆍ수생목’의 상생, 즉 하늘의 형이상학적 이치를 밝힌 것이고, 낙서는 ‘수극화ㆍ화극금ㆍ금극목ㆍ목극토ㆍ토극수’의 상극, 즉 땅의 형이하학적 이치를 밝힌 것이다.
<하도의 선천괘> <낙서의 후천괘>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得志於天下矣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勝以喪禮處之(시락살인 부락살인자 즉불가득지어천하의 길사상좌 흉사상우 편장군거좌 상장군거우 언이상례처지 살인지중 이애비읍지 승이상례처지)
제자백가 가운데 전쟁을 적극적으로 비난하고 반대한 사람은 墨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儒家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되 불가피하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위 문장은 儒家의 발언에 가깝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껏 헤쳐온 노자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유추해 보건대,‘무기’를 ‘언어문자, 세속적인 지식’의 비유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지. 언어문자와 지식의 속성과 한계에 대해서 노자가 <도덕경>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에 그리 생각해 봄직도 괜찮지 않겠나 싶다.
佛家에서는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는 것을 ‘갈등(葛藤)’이라 표현한다. 칡덩굴과 등덩굴이 잔뜩 얽혀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다는 그런 얘기이겠다. 1장 첫머리의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가 함축하고 있듯, 노자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언어와 문자, 그리고 지식은 그저 방편일 따름이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뭍에서도 내내 짊어지고 다닐 것인가.
중국 당나라 때 신찬(神贊)이라는 스님의 은사는 종일토록 경전만 읽고 그 이치를 좇는 일테면 교학승(敎學僧)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신찬은 절을 떠나 한동안 돌아다니다 선종의 백장(百丈) 스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절에 돌아온 어느 날, 신찬의 은사 스님이 창문 밑에서 글을 읽는데 방에 들어온 벌이 나갈 길을 찾느라 문 창호지에 몸을 부딪히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신찬이 입을 열었다.
“세계가 저리 넓은데 돌아나갈 줄 모르고 낡은 창호지만을 죽어라 뚫고 있으니, 나귀해에나 나가려나!”
그러자 은사 스님은 자기를 빗대 조롱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맹랑한 제자놈을 노려보았다.
쥐, 소, 호랑이 등의 십이지(十二支)에 나귀는 없으니, 옛책만 들여다봐서는 평생 득도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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