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33장. 모든 인연을 쉬고

slowdream 2007. 8. 10. 19:03
 

<제 33장. 모든 인연을 쉬고 헐떡거림이 없으면>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스스로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남을 이기는 것을 힘있음이라 하고,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부유함이며, 스스로를 이겨냄을 뜻있음이라 한다. 제자리를 잃지 않으면 영원하며, 죽어도 죽지 않음을 생명이라 한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지인자지 자지자명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밖으로 구하는 것은 지혜요, 안으로 구하는 것은 밝음이라. 노자는 세간의 지혜를 유위의 시시비비, 즉 분별심에서 비롯하는 망상으로 취급한다. 19장에서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백 배는 더할 것이다”라 하였고, 앞으로 전개될 65장에서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의 도둑놈”이라고까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공자는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혜” 라 했으며, 自勝者强은 <주역> 건괘(乾卦)의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는 이로써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自彊不息)”와 같은 의미이겠다. 道를 섬기는 사람만이 안팎으로 밝고(內外明徹)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통속적인 지혜를 좇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어 비꼬는데, 훤주(暖姝)와 유수(濡需), 권루(卷婁)가 그것이다.

“훤주란 한 스승의 말만 좇아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만물에 처음이 없었다는 것을 모른다. 유수란 돼지에 기생하는 이를 가리킨다. 돼지의 성긴 털 사이나 발굽 귀퉁이ㆍ젖통ㆍ사타구니 등을 궁전으로 여기고, 백정이 돼지를 죽일 때 자신도 함께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권루란 순임금과 같은 사람이다. 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누린내 때문이듯, 백성들이 순임금을 따르는 것도 그의 언행을 흠모하기 때문이다. 세 번이나 성을 옮겨도 백성들이 따르는 탓에, 마침내 순임금은 늙어 총명이 다해도 돌아가 쉴 줄을 몰랐다.”

 

  유약한 아첨꾼 지식인 훤주, 우물 안 개구리 지식인 유수, 자리에 이끌려 부질없이 고단한 지식인 권루. 이 또한 우리 시대 지식인의 자화상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지족자부 강행자유지 불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그렇다면 ‘지혜’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밝음’은 무엇인가. 우리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바깥 경계에 던진 눈길을 접고 마음을 응시했을 때 주어지는 참지혜, 깨달음이 바로 ‘밝음’이다. 그 본래의 마음자리를 잃지 않으면 육신은 재가 되어 사라져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달마 대사에게서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받고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된 신광(神光) 스님의 일화이다. 달마 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수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엄동설한에 신광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땅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달마 대사가 면벽한 채로 눈길도 주지 않자, 신광은 춥고 눈 내리는 긴 겨울밤을 인내 하나로 버티며 계속 꿇어앉아 있었다. 눈이 신광의 허리까지 수북히 쌓였지만, 달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신광은 자신의 믿음이 간절함을 보여주기 위해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쳤다.

  그제서야 달마가 신광에게 물었다.

“무엇을 구하고자 왔는고?”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불안한 그 마음을 여기 꺼내 보아라.”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신광이 대꾸했다.

“이 마음을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나이다.”

“이제 네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느냐?”

  그 말끝에 신광은 눈앞이 환해졌다.

“스님, 공부를 어떻게 지어나가야 되겠습니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