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장. 만물을 입혀 기르나 주인 되려 하지 않고>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큰 道는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어디에나 넘쳐 흐른다. 만물이 의지하고 살아가나 道는 마다하지 않는다. 일을 이루고서도 이름을 남기지 않고, 만물을 입혀 기르나 주인 되려 하지 않는다. 道는 항상 욕심이 없으므로 가히 작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이 귀의하나 주인 되려 하지 않으니 가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성인은 스스로 위대하다 하지 않고, 그러므로 능히 클 수가 있다.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대도범혜 기가좌우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공성불명유 의양만물이불위주)
여러 번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내용으로, 道는 무소부재한 존재이며, 만물을 낳고 기르되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며 주인 노릇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道가 주체이고 만물이 객체인 것처럼 표현은 했지만, 실상 둘의 관계는 동등하다. 주객(主客)과 안팎이 둘이 아님[不二]의 관계인 것이다. 道가 없다면 만물이 존재할 리 없지만, 만물이 없다면 道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道는 이법인 게놈(genome)이며, 만물[有]은 인간의 몸을 이루는 팔ㆍ다리ㆍ오장육부 등이며, 천지[無]는 인간의 몸이겠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빌리자면, 道는 理요 만물은 氣이다.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거장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고봉(高峰) 기대승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통해, 道와 만물의 관계를 유추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법하다. 사단은 맹자가 말한 인간의 착한 본성의 실마리인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마음을 말하고, 칠정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인간 감정의 총칭으로서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 이황의 이웃에 살던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펴내며 “사단은 항상 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理에서 시작되고, 칠정은 알맞으면 선이지만 모자라거나 지나치면 악이기 때문에 氣에서 시작된다(四端理之發 七靑氣之發)”고 했는데, 이황은 “사단은 理가 움직여서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氣가 움직여서 드러난 것(四端理之發 七靑氣之發)”이라고 받았다.
그리고 6년이 지난 뒤 기대승이 이황의 사단칠정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구별되는 것은 사단이 부분적인 감정이고 칠정이 전체적인 감정이라는 차이밖에 없으며, 두 가지 모두 언제나 理와 氣가 함께 있는 것이므로 둘을 갈라보아서는 안 되고, 감정의 움직임은 氣가 드러난 것일 뿐 사단을 가리켜 움직일 수 없는 理가 드러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마침내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하여 “사단은 理가 발함에 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함에 理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였다. 이황의 논지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자 주리론(主理論이)라 한다면, 기대승은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 一元論)이자 주기론(主氣論)이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은 비유로써 자신의 논지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황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사람과 말로 비유하여,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고 사람이 간다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대승은 달을 비유로 들며 이황의 논지에 맞선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의 달이지만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은 물에 비친 달과 같으며, 하늘의 달과 물에 비친 달 모두가 달이라고 역설했다.
두 사람 사이에 몇 차례 편지가 오가다가 이황은 더 이상의 논쟁이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답장 대신 한 편의 시를 보낸다. 기대승도 성리학의 거두인 선배의 논지를 일부분 수용하면서 논쟁은 건설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논쟁은 엉뚱하지만 당파 싸움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씁쓸하지만. 학문의 세속화와 권력화가 빚어낸 추악함이라 할 수 있겠다.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에 빗대서 필자의 <도덕경> 해석을 규정한다면, 기대승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상무욕 가명어소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이기종부자위대 고능성기대)
유위의 삶을 확인하는 현장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서점도 그 하나이다. 처세학 코너에 가보면 그 위치도 길목이지만, 서적의 양도 엄청나며 신간 또한 쉴새없이 쏟아진다. 반면에 철학 코너는 외진 곳에다 장서량도 볼품없고 발길 또한 드물어 한적하기 그지없다. 한 해에만도 수 천 아니 수 만종의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고전(古典)은 수 천년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면면히 그 생명을 이어온다. 이것이 바로 세간의 ‘지혜’와 道의 ‘밝음’의 차이 아닐까.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외국어도 모국어처럼 익숙해져야 하고, 컴퓨터에도 능통해야 하고, 재치와 유머를 갖춰야 하고, 외모지상주의의 현실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을 가꾸고 성형마저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재테크, 시테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뿐이랴? 한국사회의 미덕인 ‘더없이 인간적인’ 인간관계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삶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고달픈 유위의 하루이다.
무욕의 삶은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속에 아파트와 자동차, 적금통장이 차지하는 평수가 좁아지는 만큼 넉넉함의 평수는 넓어진다. 무욕의 삶은 타는 듯한 갈증이 없으므로, 걸음도 느려진다. 속도가 느려지는 만큼 우리를 둘러싼 풍경에 여유로운 눈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 모든 존재의 신비에 마음이 설레며,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 바람 한 줌에도 감사해 한다. 이해와 득실로 채워진 차가운 만남이 아니라, 체온이 흐르는 따스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허공을 비껴가는 바람처럼, 물위에 잠시 머무는 달처럼, 흔적 없는 무위의 하루이다. 존재론적인 삶과 소유론적인 삶,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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