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장. 담박하여 아무 맛도 없는 道>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위대한 현상계를 움켜쥐면 천하가 돌아가며 돌아가도 해가 없으며 편안하고 공평하고 태평하다. 음악과 좋은 음식은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만, 道의 드러남은 담박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볼만한 무엇이 없고, 들어도 들을 무엇이 없으나, 쓰면 다함이 없다.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집대상 천하왕 왕이불해 안평태)
14장에서의 ‘無物之象’에서 말했듯, 大象은 無인 현상계이다. 象은 갑골문이나 금문ㆍ전서에 따르면, 코끼리를 그려낸 글자이다. 고대 중국의 황화에는 코끼리가 살고 있었으며 소처럼 부렸는데, 기후가 급변해서 멸종했고 그 후 상상과 신화 속의 동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위대한 현상계를 움켜쥔다’는 말은 無를 통해서 道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有의 현상계인 천하가 돌아간다 해도, 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無에서 다시금 有로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편안하고 태평한 것이다. 이는 곧 삶과 죽음의 순환을 가리킨다. 사계(四季)가 끝없이 반복되듯,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옷을 갈아입는 것에 지나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자리하면 절로 삶이 편안해질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은 계급과 지위ㆍ성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질서이므로 공평한 것이고,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가 치졸스럽고 소박한 것이 아니라 원대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노자의 象을 플라톤의 형상(形象)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Idea)는 형상ㆍ원형 등으로 번역되는데, 물질 세계 저편의 궁극적 원리나 실체를 가리키며, 우리식으로 바꾸자면 바로 道이며 理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로 이데아를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동굴에 갇혀 있다. 입구를 등진 의자에 꽁꽁 묶여 있어서 뒤돌아보지 못하고 앞의 벽밖에 볼 수가 없다. 의자 뒤쪽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다. 그리고 불과 의자 사이에서 온갖 사물들이 서성댄다. 그런 탓에 그의 눈에는 오로지 사물의 왜곡된 그림자와 소리만이 보이고 들릴 따름이며, 그것이 세상의 진리라고 여긴다. 만약에 그가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어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면, 이제까지의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가 진리라고 여겼던 모습은 모닥불에 의해 일그러진 그림자일 뿐이며, 그가 진리라고 여겼던 소리는 동굴 벽에 울린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동굴에서 벗어나왔다고 가정해 보자. 동굴에서 빠져나와 햇살 아래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동굴 속에서 확인한 그림자의 실체가 진리라 여겼는데, 그 실체 또한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늘진 동굴 속의 사물은 태양에 드러난 사물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동굴의 비유’를 <도덕경>의 차원으로 끌어들여오자면, 그림자는 有, 동굴 속의 사물은 無, 태양은 道라 할 수 있겠다.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악여이 과객지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현실은 늘 관심의 대상이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道의 세계는 늘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出口’는 道의 실천인 무위로 읽어도 되고, 道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무위나 道에 관한 말씀은 소금을 안 친 듯 밋밋한 음식 같고, 철지난 옷차림 같고, 아이들을 나무라는 어른들의 잔소리 같다. 우리의 오감 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각이 視와 廳이다. 위에서 인용한 동굴의 비유에서도 그림자와 소리를 예로 들었듯이. 그리고 출구는 동시에 입구이다. 道는 현실로 펼쳐져 나오고 현실은 道로 들어간다. 족자(簇子)를 비유로 들어보면, 족자 앞면은 有이고 뒷면은 無이며, 족자를 펼치는 건 道에서 현실로 나오는 것이며, 족자를 돌돌 마는 것은 현실에서 道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동차도 낡으면 덜컹거리고 고장이 나며, 통장 잔고도 급하면 비워야 하지만, 道는 아무리 퍼내 써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道를 마음에 품을진대, 세상의 그 무엇이 아쉽겠는가.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대표적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며 저 넉넉한 道의 세계에 따뜻한 눈길을 건네보자.
“……나 이제 돌아왔노라. 사귐을 버리고 속세와 거리를 두리라.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금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요……그만두어라. 몸뚱이를 우주에 맡김이 다시 얼마나 되겠는가. 마음이 머무는 대로 흐르지 않고 어찌하여 황망히 걸음을 옮긴다 말인가. 돈도 지위도, 죽어 낙원에 태어남을 바라지도 않노라. 좋은 시절 생각하며 외로이 걷기도 하고, 혹은 지팡이를 세우고서 김을 매기도 하노라. 조화의 수레를 타고 다시금 돌아가니 천명을 즐기되 무엇을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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