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장. 함이 없으나 못함이 없는>
道常無爲而無不爲 候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道는 항상 함이 없지만 못함이 없다. 천자와 제후가 능히 이를 지키면 만물은 스스로 생장하고 변화한다. 그럼에도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면 나는 無名의 통나무로써 누른다. 無名의 통나무는 욕심을 없애고, 욕심이 없으면 고요해지고, 천하가 스스로 안정될 것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 候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도상무위이무불위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道의 실천인 무위는 곧 無不爲임을 천명한다. 물고기가 물에서 뛰놀듯 바람이 허공을 휘젓듯, 아무런 걸림이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힘이다. 어떤 의도를 갖고서 행하는 작위는 결국 일을 그르친다. <맹자>에 나오는 일화가 이러한 작위에 대한 우화이다. “송나라 사람이 곡식이 빨리 자라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서 온종일 잡아당겨 뽑아놓고서(揠苗) 황망히 집에 돌아왔다. 가족에게 자랑스레 말하길, ‘그놈의 벼가 안 자라서 빨리 자라게 도와주었지(助長)!’ 아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곡식이 말라 죽어 있었다.” 알묘(揠苗)와 조장(助長)은 나름대로 애를 쓰나 그 보람도 없이 헛되다라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유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만 내버려두면 만물은 절로 생장하고 변화한다. 계절을 따라서 봄에는 생하고 여름에는 성장하고 가을에는 거두며 겨울에는 저장한다.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장수장(生長收藏)은 우주의 이법이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欲은 갈애(渴愛)이니 곧 탐욕과 들뜸, 어리석음이다. 이러한 욕망이 마른 짚단에 불이 붙듯 거세게 일어날 때에는, 無의 세계로 눈길을 던져서 불길을 잡는다는 얘기이다. 욕망은 결국 너와 나를 구분하는 자의식[我相]에서 비롯하므로,‘나’라고 할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레 불길이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고요한 무위행을 닦게 되는 것이다. 유위는 뜻과 말의 길을 일으키지만, 무위는 마음과 말의 길이 사라진다. 세속적인 욕망의 불길에 사로잡힌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위의 삶을 꾸리는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난해 보인다. 그러나 道를 닦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욕망에 덜미를 잡힌 사람의 곳간에 가득 차 있는 것은 팔만 사천 가지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가 스님은 <증도가(證道歌)>에서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구나. 내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 일찍 온갖 서적을 살폈다.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닷속 모래를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다네” 라고 유위와 무위의 삶을 뚜렷하게 대조시켰다.
선종의 3조 승찬 선사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고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다.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라 하며 도를 섬기는 무위를 설파했다.
去年貧 未是貧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네
今年貧 始是貧 올해 가난이 비로소 가난
去年貧 猶有卓錐之地 지난해 가난은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今年貧 錐也無 금년 가난은 송곳마저 없다네
중국 당나라 향엄(香嚴) 스님의 오도송인데, 이 얼마나 넉넉한 무위의 삶인가.
'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경 39장.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0) | 2007.08.10 |
---|---|
도덕경 38장. 예의란 어지러움의 우두머리 (0) | 2007.08.10 |
도덕경 36장. 움츠리면 펴지고 (0) | 2007.08.10 |
도덕경 35장. 담박하여 아무 맛도 없는 (0) | 2007.08.10 |
도덕경 34장. 만물을 입혀 기르나 (0) | 2007.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