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27장. 달이 물위를 스치며 자취가 없고

slowdream 2007. 8. 10. 19:00
 

<제 27장. 달이 물위를 스치매 자취가 없고>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爲要妙


잘 걷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잘하는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이 없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매듭을 잘 맺는 사람은 새끼줄을 쓰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므로 버릴 사람이 없고, 늘 사물을 잘 구제하므로 버릴 사물이 없다. 이를 일컬어 대대로 이어오는 지혜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바탕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아끼지 아니하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된 것이다. 이를 일컬어 지극한 신묘라 한다.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행무철적 선언무하적 선수불용주책 선폐무관건이불가개 선결무승약이불가해) 

 

  앞서 말했듯 善을 <주역>에서는 ‘道를 잇는 것을 선이라 한다’라 했는데, 노자도 이 말에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을 듯싶다. 그런 즉 善行은 곧 道를 섬기는 무위이며 유위와 달리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 어떤 흔적도 찾기 어렵고, 道를 섬기는 말은 흠이 없다는 얘기이다. 하늘나라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과도 같겠다. 허공을 휘젓는 바람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물위를 스치는 달이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듯, 통속적인 의도나 목적을 지니지 않은 행위에서는 흠도 티끌도 자국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자가 한번은 양(梁)나라 혜왕을 초청해서 백정이 소 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백정의 손놀림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혜왕이 경탄하며 말했다.

“훌륭하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러자 백정이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道입니다. 결코 기술이 아니지요.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오로지 마음만이 움직입니다. 소의 결을 따라 칼을 움직여 살과 뼈 사이의 큰 틈을 쪼개 벌리고,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밀어넣고 따라가니, 뼈나 살이 엉겨붙은 곳에 칼이 닿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하물며 큰 뼈에 닿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이 엉긴 곳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다달이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지금 19년이 되었습니다만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롭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빈 틈에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혜왕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그대는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려!”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시이성인상선구인 고무기인 상선구물 고무기물 시위습명) 

 

  무위를 행하는 성인은 사람을 이끌 때 어떤 흠도 없이 그 사람을 완벽한 상태로 이끌어주므로, 버릴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물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된다. 사물을 다루고 활용함에 있어서 무심의 경지에 있으므로, 버릴 무엇이 없다. 이는 곧 사람이든 사물이든 성인은 분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너는 키가 크고 날씬해서 마음에 들고, 너는 키도 작고 뚱뚱해서 마음에 안 든다는 분별지의 태도는 성인의 몫이 아니다.

 

  성인은 유위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위의 눈길로 사람과 사물을 대한다. 생김새와 성품, 취미, 신앙, 성별, 학벌, 출신, 사회적 지위, 경제력, 집안 등등의 이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다같이 똑같은 사람일 뿐이며, 한 가지에 핀 꽃도 서로 다르듯 그저 다를 따름이다. 어떠한 의도나 목적, 편견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襲은 ‘대대로 이어지다’ㆍ‘걸치다’ㆍ‘포개다’등 여러 뜻이 있는데, 맥락상 ‘밝은 지혜’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佛家의 표현을 빌리자면, ‘깨끗한 유리병에 밝은 달을 담듯 안팎으로 밝은 지혜(內外明徹)’이겠다.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爲要妙(고선인자 불선인지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시위요묘) 

 

  善人은 성인이겠고, 不善人은 평범한 사람, 중생이다. 선인이 불선인의 스승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불선인이 선인의 바탕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곧 불선인이 있기에 선인이 있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선인과 불선인은 서로에게 스승이자 거울과도 같은 바탕인 것이다. 둘은 서로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그러기에 불선인이 선인을 귀히 여기지 않고 또 선인이 불선인을 아끼지 않는다면, 스스로는 지혜롭다 할지 몰라도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이다.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치는 것을 배우고,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배운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확인할 수 있다. 선인이 불선인이며 불선인이 선인이라는. 둘 사이의 거리가 무화되어 합일되는 경지. 이것이 바로 노자가 지향하는 道의 세계이자,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 만물은 하나)’과 ‘물아일체(物我一體 : 주관과 객관의 합일)’이다. 그리고 이는 곧 유토피아(utopia), 엘도라도(El Dorado), 도원경(桃源境), 에리훤(erehwon) 아니겠는가. erehwon은 nowhere를 뒤집어놓은 조어(造語)인데, 이상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뒤집어 존재하는 것으로 역설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흐려진 우리의 눈길을 뒤집으면, 현실이 곧바로 이상향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얘기이겠다. 그리하여 지극한 신비이며, 신묘한 경지라는 것이다.  

 

  중국 선종의 뛰어난 선사인 파릉(巴陵)에게 한 스님이 여쭈었다.

“무엇이 제바(提婆)의 종지입니까?”

  파릉 화상 왈,

“은쟁반에 흰눈이 가득 담겼다네.”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사상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반야공(般若空) 위주의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식설(唯識說)을 종지로 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가 바로 그것이다. 중관학파의 시조는 <중론>을 지은 용수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법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제바이다. 그는〈백론(百論)〉의 저자로서 불법의 논쟁에 매우 뛰어난 변론가였다. ‘제바종’이란 용수와 제바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대승 반야사상의 불교교단, 즉 교종(敎宗)을 가리킨다 하겠다. 그러므로 질문의 요지는 선종과 교종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적막한 겨울 산사 법당에서 두 스님이 천지 가득 내린 눈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법문을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하지 않은가. 원오(圜悟) 선사가 이 두 스님의 법거량을 두고“흰 눈이 갈대 꽃밭에 내리니 흔적을 구분키가 어렵다”라고 덧붙였는데 사족(蛇足)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