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25장. 사람은 땅을 본받고

slowdream 2007. 8. 10. 18:59
 

<제 25장.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온갖 것이 한데 엉켜 있는데, 먼저 천지가 펼쳐진다. 고요하고 텅 비어 있음이여. 홀로 존재하며 변하지 않고, 두루 다니되 지치지 않는다.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 하겠다. 나는 그 이름을 모르나 말하자면 道라 한다. 굳이 덧붙인다면 크다는 것, 큼은 뻗어나간다는 것, 뻗어나감은 아주 멀다는 것, 아주 멂은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道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역시 크다. 세상에는 큰 것이 4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왕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道를 본받고, 道는 자연을 본받는다.



有物混成 先天地生(유물혼성 선천지생) 

 

  번역상 매우 모호한 구석이 크다. 그런 탓에‘혼돈된(분화되지 않은) 무엇이 있었고 천지에 앞서 생겼다’로 옮길 소지가 크다. 그리고 뒷문장과 연결시켜 이를 道라고 이해한다. 문제는 物과 生이다. 生은 獨立과 모순된다. 독립은 그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존재이다. 生은 그 무엇을 전제로 한다. 뒷문장과 같은 맥락으로 잇고자 했다면 生이 아니라 有가 더 적절했으리라. 道는 불생불멸, 무시무종하는 스스로 존재이유를 갖는 독립된 존재이므로. 物의 경우, 1장에서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無名은 천지의 비롯이며, 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 했는데, 여기에 굳이 物을 넣어서 혼란을 자초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 道는 형이상인 이법이자 질서이므로, 형이하인 物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14장에서의 道에 관한 설명을 참고한다면 이 부분이 道를 설명한 것이 아님을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한 물건도 없는 상태로 돌아오니 이를 모양 없는 모양, 한 물건도 없는 형상이라 말하며, 가히 황홀이라 말한다.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으며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옛 道로써 오늘의 有를 다스린다. 그리하여 옛 시초를 알 수 있으니 이를 道의 벼리라 한다.” <주역>에서의 풀이는 좀더 명확하다.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형이상자가 무형의 도요, 형이하자는 유형의 기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부분을 ‘온갖 것이 한데 엉켜 있는데, 먼저 천지가 펼쳐진다’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뒷문장과는 불연속적으로 취급한다. ‘온갖 것이 한데 엉켜 있다’는 무한한 有의 세계 즉 無를 가리킴이고, 여기에서 천지가 비롯한다는 것이다. 名은 현상계로, 佛家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계(法界)이다. 無名, 즉 無의 현상계는 이름 없는 무한한 有가 한데 엉켜 있는 곳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강물을 한줌 떠낸다 한들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분명 강물과는 다르지만, 이 또한 그저 강물일 따름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한줌씩 강물을 떠낸다 해도, 우리는 그 개개의 강물들에 제각기 다른 이름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너의 손에 담긴 강물, 나의 손에 담긴 강물이다. 하늘 한구석, 땅 한자락을 오려낸다 해도, 그것에 어떤 이름을 건넬 것인가. 그저 하늘이고 땅일 따름이다.

 

 ‘먼저 천지가 펼쳐진다’는 이러한 無의 세계에 천지라는 이름을 주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어서 有의 세계 즉 만물이 펼쳐진다는 ‘後萬物生’이 생략되었다고 이해해도 좋겠다. 물론 앞서거니 뒤서거니 先後에 시간적인 무게를 주지는 말아야겠다. 有에 비해 無를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설명할 따름인 것이다. 無와 有는 동시에 존재한다. 질서정연한 有名의 세계를 코스모스(cosmos), 무질서한 無名의 세계를 카오스(chaos)라 이해함은 어떨지.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적혜요혜 독립이불개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여기서부터 道에 관한 설명이다. 反은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道의 속성인 무시무종, 무소부재를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시공간적으로 결코 가늠할 수 없지만, 다만 잠시도 쉬지 않고 운동할 따름이라는. <주역>의‘음양이 갈마드는 것을 道라 일컫는다’,‘펼쳐지고 펼쳐지는 것을 易이라 이른다’와도 같은 맥락이겠다. 또한 反은 22장에서의 ‘휘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펴지니’의 논리와 부합한다.  王과 人은 聖人의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무난한 단락이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法을 ‘본받다’로 해석해도 되겠고, 앞의 낱말과 짝을 지어 ‘사람의 법은 땅이고, 땅의 법은 하늘이며……’라고 옮겨도 좋겠다. 삼재(三才)인 하늘ㆍ땅ㆍ사람 즉 천지만물은 道를 섬기고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道를 이제껏 佛家의 緣起, 中道와 같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緣起와 中道는 무엇인지 부처의 가르침과 성철(性徹)스님의 <백일법문(百日法門)>에 의지해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 보자. 불교의 근본교리에는 緣起, 中道, 사성제(四聖諦)가 있는데, 이를 이해하면 부처의 가르침을 거의 이해했다 여겨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가 道를 이루고 나서 다섯 제자에게 처음으로 법문을 설했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中道 선언이다. 

 

  ……그때에 세존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 할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그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 현성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상대적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는데, 선악(善惡)ㆍ고락(苦樂)ㆍ유무(有無)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여기에서는 苦와 樂을 예로 들었다. 첫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낙을 가리킨 것이고, 두 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고를 가리킨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한 것이다. 당시에는 고행을 위주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변견에 사로잡힌 수행자들이 많았는데, 부처가 처음 법을 설한 다섯 비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탓에 고락을 예로써 中道를 설한 것이다.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깨닫자면 고락을 죄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中道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로 인해 꽤 사람들에게 알려진 <수타니파아타>라는 경전에도 나온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제 緣起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때에 세존은 처음 깨달음을 성취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결가부좌하신 채로 7일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계셨다. 세존은 초저녁에 緣起를 순역(順逆)으로 생각하셨다. 無明에 연하여 行이 있고 生에 연하여 老死가 생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 일어나느니라. 無明이 멸하면 行이 멸하고 내지 生이 멸하면 老死가 멸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의 쌓임이 멸하느니라.”

 

  緣起라면 보통 존재의 법칙인 12緣起를 가리킨다. 이는,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를 가리킨다. 無明은 지혜가 없음을 말하며, 이는 곧 불교의 진리인 緣起나 無我의 도리를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行은 무지로 인하여 행한 행위의 형석력, 識은 인식작용 또는 인식의 주체, 名色은 識의 인식대상인 물질[色]과 정신[名]이다. 六處는 인식대상을 감지하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육근(六根), 觸은 識과 名色과 六處의 셋이 접촉함을 뜻한다. 受는 이러한 접촉에서 생기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 등의 감수작용, 愛는 이러한 감수작용에 따른 그릇된 애증, 取는 맹목적인 애증에 따른 집착을 말한다. 有는 애증과 집착에 의해 결정된 존재, 生은 그 존재의 발생 또는 영위, 老死는 생으로부터 빚어지는 늙고 죽음이나 그로 인한 괴로움을 가리킨다.

 

  緣起에는 두 가지 관(觀)하는 법이 있다. 순관(順觀)은 십이연기를 차례로 관찰하는 것으로 곧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고 식이 있으며……’라고 관하는 것이다. 역관(逆觀)은 순관과 달리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라고 관하는 것이다. 순관에 따르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생과 노사가 있게 되므로,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역관에 따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생이 멸하고 노사가 멸하므로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있다는 견해,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한 극단이요, 또 없다는 견해,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없어서 소렴되고 만다는 생각이 또다른 극단이다. 부처는 이 양 극단을 떠나서 中道에 의해 법을 설한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無]이 없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有]이 없다……일체는 있다고 한다. 이것이 첫번째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두번째 극단이니라.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해 법을 설하느니라……이른 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세운 짚단처럼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즉 상보성(相補性)과 상의성(相依性)을 뜻한다. 개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존재한다 할 수 없으나, 상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존재한다. 그런 즉 中道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非無], 또한 있는 것이고 또한 없는 것이다[亦有亦無].  集과 滅은 사성제의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고제(苦諦)는 중생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 집제(集諦)은 그 괴로움의 원인, 멸제(滅諦)는 괴로움의 소멸, 도제(道諦)는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緣起에는 中道와 사성제의 진리가 한데 얽혀 있다. 즉, 연기가 중도이며 사성제인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과 쌓임, 소멸과 그 길은 모두 緣起에 있음을 부처는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