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휘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펴지니>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휘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펴지고, 패이면 채워지고, 헐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본보기로 삼는다. 스스로를 드러냄이 없으니 밝고, 스스로를 옳다 함이 없으니 빛나며, 스스로 자랑함이 없기에 공이 있고, 스스로 뽐냄이 없으니 오래 간다. 무릇 다툼이 없으니 천하의 그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다. 휘면 온전할 수 있다는 옛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그러하니 온전함을 이루면 돌아갈진저.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 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반(反)과 역(易), 즉 中道의 이치를 설명하는 자리이다. 反은 ‘돌아감’ㆍ‘되풀이함’ㆍ‘뒤집힘’이 그 뜻이며, 易은 ‘쉬움’ㆍ‘펼쳐짐’ㆍ‘바뀌지 않음’이다. 분별지의 세계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 무분별지의 세계에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차별이 사라진다. 차별하는 유위의 눈길에 공존 불가능의 대상으로 비칠 따름이지, 무차별한 무위의 눈길에는 공존 가능한 대상, 더 나아가 그 둘이 서로 다르지 않음[不二]으로 비친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有의 세계가 다시금 펼쳐진다[非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抱一’인 것이다.
6조 혜능 선사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하나인 청원(靑原) 선사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러나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네. 그러나 이제 참된 깨달음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진정 산이요 물은 진정 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견해가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인식 주관을 강조하는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山是山 水是水’의 단계를 분별지[有],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의 단계를 무분별지[空], ‘山是山 水是水’의 단계를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 : 不空)로 구분한다. 노자의 道와 佛家의 中道는 緣起로서 이들 현상계를 존재케 하는 질서이자 이법이다. 즉 진공묘유(眞空妙有)ㆍ비유비무역유역무(非有非無亦有亦無)ㆍ불이비일(不二非一)ㆍ색불이공공불이색 색즉시공공즉시색(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그리고 무위는 무념(無念)과 같다 하겠다. 무위와 무념은 中道의 실천적 덕목으로 有와 無를 모두 떠난 무분별후득지의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혜능 선사가 무념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維摩經)>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外能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하였느니라.”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불자견고명 불자시고창 불자벌고유공 불자긍고장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고지소위곡즉전자 기허언재 성전이귀지)
여기서 또한 역설과 반어의 논법이 펼쳐지는데, <도덕경> 곳곳에서 중언반복되다 보니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말 많음(多言)을 경계하면서도 그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자리가 적지 않지만, 노파심(老婆心)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밖에. 自란 我相, 요새 말로 하자면 자의식(自意識)에 다름 아니겠다. 歸之의 之는 抱一이다. 결론인즉,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얘기이겠다. 어찌 보면, 공자의 <논어(論語)> 한 구절을 대하는 듯한 착각이 들 법도 싶다. 허나 有爲的인 태도에서는 몸을 높이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감춘다. 득실의 이해타산이 분명하다.
노자의 무위행은 그러한 통속적인 의도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흐를 따름이다. 흐르다 보니, 고이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며, 구름이었다가 빗물이었다가, 작은 냇물이 되었다가 거친 강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不自見故明에서의 不을 ‘道로 향하는 무위의 실천’인 입장에서 적극적인 의지로 보고‘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에 밝다’라 옮기기보다는, ‘道의 현실적 표현인 德’의 입장에서 시비분별이 아예 자리하지 않는 ‘스스로를 드러냄이 없기에 밝다’로 옮기는 것이 좀더 어울릴 듯싶다. 의미의 차이는 뚜렷하지만,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한다면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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