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9장. 무명의 흰바탕

slowdream 2007. 8. 10. 18:55
 

<제 19장. 무명의 흰 바탕을 드러낸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백 배는 더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에게 효와 자가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교묘한 재주를 끊고 사리를 버리면 도둑이 사라질 것이다. 이 셋의 가르침만으로는 부족하니, 돌아갈 바가 있어야 한다. 무명의 흰 바탕을 드러내고 질박한 통나무를 품고, 사리사욕을 줄여야 한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절성기지 민리백배 절인기의 민복효자 절교기리 도적무유) 

 

  18장에 이어서 여기에서도 노자는 儒家의 인위적인 도덕질서의 폐해를 질타한다. 그냥 내버려두면 절로 잘 굴러가는데 왜 나서서 오히려 일을 그릇되게 하느냐,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가 분명하다는 비난이다. 계급적 분석의 칼을 들이밀면, 쁘띠 부르주아(petit-bourgeois)인 지식인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하겠다는 속셈이 아니냐는 것이다. 民利의 利와 棄利의 利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피지배계층의 이익이며 후자는 그 대척점인 지배계층의 이익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는 모순이므로 공존의 여지가 없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노자의 얘기는 다만 이는 유위에 의한 왜곡된 질서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수직적 차별이 아닌 수평적 차이는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有에서의 緣起이다. 왜곡되고 인위적이지 않은 관계에서의 타자(他者)의 인정.  

 

  장자는 당대의 유명한 도둑 도척(盜跖)의 입을 빌려 儒家의 인의를 비웃는다. 도척의 무리들이 우두머리인 도척에게 물었다. “도둑에게도 역시 도가 있겠습죠?” 도척 왈, “있다마다, 어디엔들 도가 없겠느냐? 방안의 물건을 짐작으로 알아맞추는 것은 성스러움[聖]이요,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기[勇]이며, 뒤에 나오는 것이 의리[義]이다. 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판단하는 것은 지혜[知]이며,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어짊[仁]이다. 이 다섯 가지 도를 갖추지 않고서 큰 도둑이 된 자는 일찍이 없었느니라.”


此三者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차삼자이위문부족 고영유소속 견소포박 소사과욕)

 

  絶聖棄智 絶仁棄義 絶巧棄利, 노자는 이 셋의 가르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이는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름대로 긍정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안 없는 비판은 무기력하며, 儒家의 가르침과 같은 결과를 낳을까 우려한다. 그래서 마땅히 돌아갈 바가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무위행은 결국 道를 향하는 것이기에. ‘무명의 흰 바탕을 드러내고 질박한 통나무를 품어야 한다’는 얘기는 이분법적인 유위의 태도를 지양하고 무차별한 무위를 내 몫으로 하라는 뜻이다. 무명과 통나무는 아직 어떤 형태로 다듬어지지지 않은 바탕 그 자체이다. 즉 無이되, 有를 품고 있다. 무명은 붉은 물을 들이면 붉게, 푸른 물을 들이면 푸르게 바뀔 것이고, 통나무는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용도로 활용될 것이다.

사욕을 줄이자는 얘기는 ‘아상(我相)’을 떨구자는 의미이다.

 

  我相이란, 나라는 개체는 사실 생멸하는 오온(五蘊), 즉 색(色-물질)ㆍ수(受-느낌)ㆍ상(想-표상)ㆍ행(行-의지)ㆍ식(識-인식)에 지나지 않는데도 영원할 것처럼 여기고 집착하는 무명(無明)의 태도를 가리킨다. 아상이 지나치면 늘 자기 입장만 헤아리므로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염치가 없어진다. 학문이나 道의 길을 걷는다 해도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겸손하다고 해서 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위의 눈길을 의식해서 행하는 겸손 또한 아상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것이다. 명예욕, 재욕, 수면욕, 성욕, 식욕 등의 오욕도 아상에서 비롯한다.

 

  <금강경>에서는 4상(四相)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사상은 바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人相은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하는 유위의 태도를 가리킨다. 소나 말  등의 미물을 보고 인간은 저들과 다르다 또는 인간은 우월하다, 인간은 본래 악하다 착하다라거나,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다 아니다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 잡힌 의식과 행동을 인상이라 한다. 衆生相은 모든 생명계 즉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법이 진리이고 생멸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윤회를 한다 아니다라거나, 세상은 누가 창조를 했다 아니다 등등. 壽者相은 살고 죽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말한다. 생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이 바로 그것이다. 한 번 사는 삶이니 어찌되든 잘살아보자며 차마 못할 짓도 스스럼없이 한다든가,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며 스스로 버리는 등 생명에 대한 집착이나 경시는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결국 ‘나’가 모든 왜곡과 집착의 시작인 것이다. 유위 또한 나를 버리지 못한 데서 비롯하며, 무위는 나를 버리면 절로 행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불교 논리학(論理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중론(中論)>에서 용수(龍樹)는 이렇게 가르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 사라진 것을 無我의 지혜라 말한다.”

 

  佛家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가운데 하나인 보시(布施) 역시 이러한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의 말로서,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베푸는 것에는 재물로써 베푸는 재시(財施)와 부처의 가르침인 진리를 가르쳐주는 법시(法施), 두려움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셋으로 구분된다. 상에 머무는 보시를 영가 스님은 이렇게 경계했다.


住相布施生天福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勢力盡而箭還墜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招得來生不如意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