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신심명(信心銘)·증도가(證道歌)

신심명

slowdream 2007. 8. 17. 04:04
 

*<信心銘>의 소개글은 성철 스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蕭湛 옮김.


<신심명>이란


<신심명>은 3조 僧璨대사가 지은 글입니다. 銘이란 일반적으로 금석.그릇.비석 따위에 自戒의 뜻으로나, 남의 공적 또는 사물의 내력을 찬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새긴 한문 글귀를 뜻하는데, 이 <신심명>은 3조 스님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할 때부터 마지막 구경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신심에 대해서 남겨놓으신 四言絶句의 시문입니다.

이 <신심명>은 글 자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심이란 道의 본원이면서 진여법계에 사무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은 우리 수도인의 좌우명인 것입니다. 승찬대사는 수나라의 양제 대업 2년 10월 5일(서기 606년)에 입적하셨으며, 그의 歲壽는 알 수 없습니다. 승찬대사가 돌아가신 지 150여 년 뒤, 당나라 현종황제가 鑑智선사라 시호를 올리고 탑호를 覺寂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 유명한 재상인 방관이 탑비문을 지었습니다.

승찬대사는 본래 大風疾이라는 큰 병에 걸려 있었는데 오늘날의 문둥병입니다. 스님은 문둥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 2조 혜가대사를 찾아가 자기의 성명도 밝히지 않고 불쑥 물었습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는 저의 죄를 참회하여 주십시오.”

“그대는 죄를 가져오너라. 죄를 참회시켜 주리라.”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니니라. 그대는 그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여 안주하라.”

“지금 화상을 뵈옵고 승보는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 법보라 하나이까?”

“마음이 부처며 마음이 법이니라.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또한 그러하니 그대는 알겠는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에 혜가대사께서 그가 法器인 줄 아시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바로 머리를 깎아주면서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을 써서 승찬이라 하라.”

그해 3월 18일 福光寺에서 具足戒를 받고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혜가 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승찬대사는 평생을 은거하여 지내다가 나중에 어린 나이의 道信선사를 만나 법을 깨우쳐주고 뒤에 구족계를 받게 한 후 법을 전하면서,

“나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에는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묘를 써서 스님을 모셨는데, 뒤에 李常이라는 사람이 神會선사에게 물어서 山谷寺에 승찬대사의 묘가 있음을 알고는 가서 화장하여 舍利 3백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승찬대사가 남겨놓은 저술이 바로 <신심명>입니다. 요즘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그 분이숨어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 모순된 점이 많다고 하여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여러 점을 상고해 볼 때, 나는 승찬스님이 실제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신심명>에 있어서 그 信, 곧 믿음은 보통의 신, 믿음이 아니라 信解悟證 전체를 통하는 신, 믿음입니다. 글 전체는 사언절구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 도리와 1천 7백 공안의 格外道里 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들 평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義理的으로 법문한 것 같지만, 간단한 이 글 전체 속에 격외도리가 다 갖추어져 있으며, 교리의 현묘한 뜻도 빠짐없이 있습니다.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고 학자들이 격찬할 뿐만 아니라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같은 문자는 하나일 뿐, 둘은 없다고들 평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불교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하면 글 전체가 모두 兩邊을 여읜 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글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待對를 40대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대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따스름(順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중생의 상대개념, 즉 邊見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준 드문 저술입니다. <신심명>은 일관된 논리로써 禪이나 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를 통해서 양변을 여읜 중도가 불교의 근본사상임을 표현한 총괄적인 중도총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信心銘> 원문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확연히 밝아지니라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천지만큼 벌어지나니

도가 드러나길 바란다면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투면 마음의 병이 되나니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도다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둥글기는 큰 허공과 같고 모자람도 남음도 없으나

취하고 버림으로 인하여 여여하지 못하네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반연도 좇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한 가지만 항상 지닌다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금 큰 움직임이 되나니

오로지 양변에만 머물 뿐 어찌 그 한 가지를 알겠는가


一種不通 兩處失功 遣有沒有 從空背空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나니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을 따르면 공을 등지느니라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상응치 못하고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도다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脚前空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잠깐이라도 돌이켜본다면 앞의 공보다 뛰어나니라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須息見

앞의 공이 전변함은 망견 때문이니

참됨을 구하지 않고 망견만 쉬면 될 따름이니라


二見不住 愼莫追尋 纔有是非 紛然失心

두 견해에 머물지 않고 좇아가 찾지도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마음을 잃느니라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垢

둘은 하나로 말미암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 펼쳐지지 않으면 만 법이 허물이 없도다


無垢無法 不生不心 能隨境滅 境逐能沈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펼쳐짐이 없으면 마음도 없나니

주관은 객관을 따라 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잠기니라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端 元是一空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자 하니 본래 하나의 공이니라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麤 寧有偏黨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만상을 포함하나니

세밀하고 거침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체가 넓어서 쉬움도 어려움도 없으나

작은 견해와 여우 같은 의심은 급하거나 더디어지니라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집착하면 법도를 잃고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서고

놓으면 스스로 그리 됨이니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느니라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자성을 따르면 도에 합하고 소요하면 번뇌가 끊기느니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니 혼침이 좋지 않느니라


不好勞神 何用疎親 欲趣一乘 勿惡六塵

좋지 않으면 정신을 수고롭게 하거늘 어찌 멀리하고 친함을 쓰겠는가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6진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느니


六塵勿惡 還同正覺 智者無爲 愚人自縛

6진을 미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각과 같고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얽어매는도다


法無二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법에는 두 법이 없나니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할 따름이라

마음으로써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착각됨이 아니랴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은 고요함과 어지러움으로 펼쳐지고 깨달음은 좋고 싫어함이 없나니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무릇 짐작하기 때문이니라


夢幻空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득실과 시비를 한순간 놓아버리라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눈에 잠이 없으면 모든 꿈은 스스로 없어지고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일여의 본체는 현묘하여 문득 반연을 잊으니

만법이 모두 가지런하여 스스로 돌아가느니라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그 까닭은 없애면 무릇 비할 바가 없느니

그치면서 움직임은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침은 그침이 없나니


兩旣不成 一何有爾 究竟窮極 不存軌則

이미 둘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구경과 궁극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아니함이라


契心平等 所作俱息 狐疑淨盡 正信調直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는 바가 모두 쉬어지고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해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펼쳐지나니


一切不留 無可記憶 虛明自照 不勞心力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무엇이 없도다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非思量處 識情難測 眞如法界 無他無自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곳이니 심식과 망정으로 더듬기 어렵나니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나도 없나니


要急相應 唯言不二 不二皆同 無不包容

급히 상응코자 한다면 오로지 둘 아님을 말할 따름이나니

둘 아님은 모두 같아서 포용하지 못함이 없느니라


十方智者 皆入此宗 宗非促延 一念萬年

시방세계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에 들어왔으니

종취란 짧고 긴 것이 아니요 한 생각이 만년이니라


無在不在 十方目前 極小同大 忘絶境界

있음도 없음도 없어 시방세계가 눈앞이니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 경계가 끊어지도다


極大同小 不見邊表 有卽是無 無卽是有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 그 다름을 볼 수 없나니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라


若不如此 不必須守 一卽一切 一切卽一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아니 되나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라


但能如是 何慮不畢 信心不二 不二信心

다만 이와 같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엇을 고민하겠는가

신심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신심이도다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의 길이 끊어지나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니라

 

蕭湛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