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록(行錄)
1.
강서(江西) 도일(道一:709-788)스님은 한주(漢洲) 시방현(시方縣)사람으로 성은 마(馬)씨이며 그 마을에 있는 나한사(羅漢寺)에 출가하였다. 용모가 기이하여 소걸음으로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 혀 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투州) 원률사(圓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唐) 개원(開院:713-742) 연중에 (형嶽)의 전법원(戰法院)에서 선정을 닦던 중 회양(懷讓:677-744)스님을 만났는데, 회양스님은 스님의 근기를 알아보고는 물으셨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회양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벽들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스님이 대꾸가 없자 회양스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坐禪)을 배우느냐, 앉은 부처를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는지 않으며, 앉은 부처(坐佛)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자,스 님은 마치 제호(醍醐)를 마신 듯하여, 절하며 물으셨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도 같다. 그대의 인연이 맞았기 때문에 마침 도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물으셨다.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거기에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생성이나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듣거라.”
심지(心地)는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 없는데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이루어지랴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스님이 덕분에 깨우치게 되어 마음(心意)이 초연하였으며, 10년을 시봉하면서 그 경지가 날로 더하였다.
이에 앞서 육조(六祖:638-713)스님이 회양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인도 반야다라(般若多羅)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 아래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사람을 밟아 버리리라’ 하셨다” 했는데, 스님을 두고 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회양스님의 제자 여섯 사람 중에서 스님만이 심인(心印)을 비밀스러이 전수받았을 뿐이었다.
처음 건양(建陽)의 불적령(佛跡嶺)에서 임천(臨川)으로 옮겨갔고, 다음으로 남강(南康) 공공산(공公山)에 이르렀으며, 대력(大曆:766-779) 연중에 종릉(鍾陵:洪州에 있음)이 있는개원사(開元寺)에 이름을 걸어두셨다. 그때 대장군(連師) 노사공(路嗣恭)이 가풍을 듣고 경모하여 종지(宗旨)를 직접 전수받았고, 이로부터 사방 납자들이 운집하였다.
회양스님은 스님이 강서에서 교화를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듣고 대중에게 물으셨다.
“도일(道一)이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느냐?”
“이미 대중을 위해 설법합니다.”
그러자 회양스님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는 스님 하나를 그곳으로 보내며 “그가 상당하였을 때 ‘어떻습니까?’ 하고 묻고 무슨 말을 하거든 기억해 오너라” 고 하셨다.
그 스님이 분부대로 가서 물었더니 스님이 말씀하셨다.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 없다.”
그 스님이 돌아와 회양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회양스님은 “그렇군” 하셨다.
스님의 입실제자(入室弟子) 139명은 각자 한 곳의 선지식이 되어 더더욱 끝없는 교화를 폈다.
스님께서는 정원(貞元) 4년(788) 정월 중에 건창(建昌) 석문산(石門山)에 올라 숲속을 거닐다가 평탄한 골짜기를 보더니 시자에게 말씀하셨다.
“썩어질 내 몸이 다음달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말씀을 끝내고 돌아와 이윽고 병을 보이므로 원주(院主)가 문안을 드렸다.
“스님께선 요즈음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2월1일, 목욕하고 가부좌한 채 입멸(入滅)하셨다. 원화(元和:806-820) 연중에 대적선사(大寂禪師)라 시호하고, 탑은 대장엄(大藏嚴)이라 하였다.
스님 밑에서 친히 법을 이어받은 제자 중에 88명이 세상에 알려졌고, 숨어서 지낸 이는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스님 성품은 인자하고 모습은 준수하였으며, 발바닥에는 두개의 고리 무뉘가 있고, 머리에는 가마가 셋이 있었다. 설법하며 세상에 머무르기 40여 년 동안에 도를 닦는 무리가 천 명이었다.
스님께서 정원(貞元) 4년, 무진(戊辰) 2월1일에 입적하니, 탑은 늑담(늑潭)의 보봉산(寶峯山)에 있다. 칙명으로 대적선사 대장엄지탐(大寂禪師大藏嚴之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상(裵相)이 액(額)을 썼고, 좌승상(左丞相) 호득흥(護得興)이 비문을 지었다.
정수(淨修)선사가 송했다.
마조 도일(馬祖道一)선사는
돌처럼 쇠처럼 완전하게 수행하여
근본을 깨달아 초탈했으니
곁가지를 찾으면 헛수고만 할 뿐이다.
오래 정을 닦던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내던져버리고
남창(南昌)에서 크게 교화를 펴시니
싸늘한 소나무가 천척(千尺)이로다.
馬師道一 行全金石
悟本超然 尋枝勞役
久定身心 一時抛擲
大化南昌 寒松天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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