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마조록(馬祖錄)

사가어록/시중

slowdream 2007. 9. 4. 17:47
 

<시중(示衆>

 

1. 


스님께서 대중에게 설법(示衆)하셨다.


“그대들 납자여,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와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가경」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바탕을 확인(印)해 주셨으니, 그대들이 완전히 잘못 알아 이 일심법이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서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心)으로 종(宗)을 삼고, 방편 없음(無門)으로 방편(法門)을 삼는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응당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선이라 해서 취할 것도 없고 악이라 해서 버릴 것도 없으며, 깨끗함과 더러움 두 쪽 다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죄의 본성이 공(空)임을 통달하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온(印) 것이다.

형상(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라 형상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따라 말하면 될 뿐, 현상이든(卽事) 이치이든(卽理) 아무 걸릴 것이 없다.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온(生) 것을 형상(色)이라 하는데, 색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난 것은 동시에 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을 확실히 알아야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부처될 씨앗(聖胎)을 길러내고 인연따라 시절을 보내게 되리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도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현상이나 이치에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도는 닦는 데 속하지 않는다.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며 공(共)을 관찰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바로 유위(有爲)에 떨어진다 하겠다. 게다가 밖으로 치달아 구하면 더더욱 멀어질 뿐이니 3계의 심량(心量)을 다 없애도록만 하라.


한 생각 망념이 3계 생사의 근본이니, 일념이 없기만 하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法王)의 위 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범부는 망상심, 즉 거짓과 삿됨, 아만(我慢)과 뽐냄이 합하여 한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법이 모여 이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날 때는 법만 일어날 뿐이며, 면할 때도 법만 멸할 뿐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이 일어날때 ‘내(我)가 일어난다’ 하지 않으며,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 하진 않는다.


전념(前念).후념(後念).중념(中念)이 생각생각 서로 의지하지 않아서 생각생각 고요함(寂滅)을 해인삼매(海人三昧)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마치 백천 갈래 물줄기가 함께 큰 바다로 모여들면 모두 바닷물이라 이름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맛(一味)에 여러 맛이 녹아 있고 큰 바다에 모든 물줄기가 섞여드니, 마치 큰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물을 다 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성문은 깨달았다 미혹해지고 범부는 미혹에서 깨닫는다.

성문은 성인의 마음에는 본래 수행지위. 인과. 계급 등 헤아리는 망상이 없음을 모른다. 그리하여 인(因)을 닦아 과(果)를 얻고, 8만겁(八萬劫). 2만겁(二萬劫) 동안을 공정(公定)에 안주하니, 비록 깨닫긴 했으나 깨닫고 나서는 다시 미혹한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은 저 지옥 고통을 보면 공적함(空寂)에 빠져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 중생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끝에 깨닫고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범부에게서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이 있지만 성문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혹에 상대하여 깨달음을 설명하였지만 본래 미혹이 없으므로 깨달음도 성립되지 않는다.


일체 중생들은 무량겁 이래로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치면 될 뿐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

설사 항하사만큼 도리를 잘 설명한다 해도 그 마음은 늘지 않으며,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줄지 않는다. 또한 설명을 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며, 설명하지 못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다. 또 몸을 나누고 빛을 놓으며 18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해도 나에게 불꺼진 재를 갖다 주느니만 못하다.


장마비가 지난 뒤 꺼진 재에 불기가 없는 것은 성문이 허망하게 인을 닦아 과를 얻음에 비유할 만하며, 장마비가 아직 지나지 않아 꺼진 재에 불기운이 있는 것은 보살의 도업(道業)이 순수하게 익어 모든 악에 물들지 않음을 비유할 만하다.


만일 여래의 방편인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쇠사슬같이 끊김이 없어 항하사겁토록 설명해도 다하지 못하게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아무 일도 없게 된다. 오랜동안 서 있었으니 이만 몸 조심하라.”



3. 


백장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근본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지금 그대가 신명을 놀리는 자리라네.”



 

출처는 http://cafe.naver.com/sun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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