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반야심경

8. 부증불감

slowdream 2007. 9. 8. 05:58
 

반야심경 7 부증불감(不增不減)


분별하는 마음은 항상 자신과 대상을 비교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늘 변화하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 비교하는 근거로 우리를 고정된 어떤 것이라고 설정해놓는다.

즉, 거울에 비친 몸과 그것을 움직이는 마음이 고정되어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분별하는 마음에는 참으로 죄송하게도

진정한 우리의 존재는 참 성품과 참 성품에 의해서 참 성품 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는 생각과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 역시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라는 것은 잠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다만, 기억이라는 놈이,

생각의 연속성이라는 고리 위에서 하나의 모습을 산출해 내고는

그것이 우리라는 고정된 습을 만들고,

그 습이 고정된 우리가 있고

그 고정된 우리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쌓아 놓은 습이라고 속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 역시 그러한 분별하는 마음에 속아서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양무제(梁武帝)가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물음에


"난 모르오."

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라는 것은 참 성품과 참 성품에 의해서 참 성품 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는 생각과 감정이어서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매 순간 생각이 바뀌기 때문에,

그 바뀌는 생각이 바로 현존하는 자신이기 때문에,

늘 변화하는 생각의 어느 것을 잡아서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의 존재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리고,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시면서

불국토 안에 수많은 불국토가 있다는 말을 하셨다.

이 말은 각자 각자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그 세상이 바로 하나의 불국토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도,

세상의 중심은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 존재의 모두가 각자 각자 다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이라는 것 역시,

중심이 된 존재에서 바라본 삼라만상이지,

누가 바라봐도 똑 같은 고정된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것은 수많은 존재의 생각과 감정이 서로 얽히는 입장에서 바라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를 볼 때에

우리에게 세계라는 것은

한 존재에게는 매 순간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맞닿았을 때에 그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고,

수많은 존재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매 순간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 순간의 세계가 각자에게 진정으로 실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즉,

하나의 사람이라도 그것을 느낄 때마다 달라서,

그가 느끼는 세계(바깥과 내면)는 매 순간 다르기에,

한 순간도 같은 것이 없고,

수많은 존재의 입장에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느끼는 그 세계를 다른 이는 어느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래서 각자가 느끼는 그 세계라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비록,

어떤 사물이나 어떤 세계에 대해서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은 할 수 있지만,

그 세계를 똑같이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실지로 사과를 보고 이야기 할 때에 똑 같이 사과라고 공감은 하지만,

그것을 그려보라고 하면,

다 다르게 그린다.

또 한 사람에게도 역시 매 순간 사과를 그리라고 하면 똑 같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의 실력의 차이도 있겠지만,(사실 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바로 매 순간 비교할 수 없이 순간 순간 변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궁극적인 이유는 사과를 보고 느끼는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존재가 느끼는 세계도 매 순간 다를 수밖에 없고

수많은 각자가 느끼는 세계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존재가 느끼는 순간과 각자가 느끼는 세계가 다 다르다는 것은,

그 느끼는 세계가

오직 매 순간 변하는 그의 생각의 범위 안에서만 그려는 것이요

또한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독특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서로의 생각에 대해서 공감을 하고,

우주 만물이 존재한다고 믿고(사실 존재한다.)

그것이 실재함을 알고 있지만,

한 존재에게 세계라는 것은 그가 순간 순간 바라보는 세상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아도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가질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아도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 전에는,

그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그러한 세상이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아도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의 생각 속에 그 세상에 대한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는 턱을 괴고 있는 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한 그의 생각 속에는 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세상이라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마다 차이가 나고 또 사람마다 생각차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이는,

아무리 우리가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든 모르든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더라도,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생각이라는 도구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인 만큼,

한 개인에게는 스스로가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생각이 일어나야만 가능하고,

또 인식할 때마다 인식하려는 여러 가지 요인이 다르기 때문이고,

여러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인식하는 시점이 다르고 그 인식의 범위도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복잡하게 이야기 한 것은,


한 개인에게는 오로지 그가 인식하는 그 순간에만 인식의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고,

여럿사람에게는 오로지 그가 인식하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의 성품(마음)과 생각의 관계에서

성품(마음, 자성)의 부증불감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증불감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각자의 존재가 어떤 것을 생각하던,

그 생각은 마음이라는 바탕이 있어야만 생각이 존재할 수가 있다.

즉, 그림을 그리려면 도화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생각이나 사물이라도,

참 성품이 없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은 자신을 바탕으로 하여서 생각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그려놓은 그림을 자신의 마음에 온전히 그려낸다.

(그려낸다고 해서 머문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 순간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의 생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려낸다고 해도,

마음자체는 절대로 늘거나 줄지 않는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마음이 생각과 같이 한다는 말이다.

즉, 자성이라는 것은 오직 한 존재에게 오직 그 순간에만 작용한다는 말이다.

물론 늘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말이다.

현재에 나툰다는 말이다.

그리고 생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니,

마음은 변함없이 늘 존재하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생각의 바탕이 된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그 생각이 송곳보다 더 작은 세계에 몰두해 있으면,

마음에는 오직 그 작은 세계만 그려져 있고,

또,

그 생각이 우주보다 더 큰 세계에 몰두해 있다면

마음은 또 우주보다 더 큰 세계의 그림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생각의 바탕이 되는 이유는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를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오직 하나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것이 사라져야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참 성품)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근원이기 때문에

매 순간 일어나는 오직 한 생각을 위해서 모든 자리를 펴준다.

그래서, 마음은 한 생각보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

생각의 크기와 꼭 같은 크기로 생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마음은 한 사람의 생각의 매 순간 맞춤 서비스를 하듯이,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각자가 저 나름대로 매순간 다른 그림을 그려내어도,

그 수많은 사람 각자 각자의 매순간 생각에 맞는 자리를 펴준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성품이 평등하리오?)


그래서 마음은(참 성품, 자성) 생각의 크기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부증불감 不增不減)


물론

현학적(衒學的)으로 이야기 하면,

마음이라는 것은(참 성품, 자성) 형체가 없기 때문에 크기를 말할 수 없으므로,

늘거나 준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생각 역시 그렇다.

이 말이 사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어쩌면 더 명쾌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증불감을 그렇게 이야기해 버리면,

우리의 직접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문을 쓰려면 몰라도.......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이는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실제적 삶에 비유하여서 이야기 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의 삶에 돌아와서 이야기 해보자.

자........ 이제 앞의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의 마음은 한 생각밖에 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맞춤 서비스와 같아서,

한 생각에 꼭 맞게 마음은 자리를 펴준다고 했다.


다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보자,

반야심경의 앞의 편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우리는 화를 내었을 때에는 화밖에 없다.

슬픔을 느낄 때에는 역시 슬픔밖에 없다.

다른 생각이나 감정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가 큰 우주를 생각할 때에도 큰 우주만 생각하고,

아주 작은 일에 몰두 할 때에도 역시 작은 일만 생각한다.


그것을 생각하거나 그러한 감정을 느낄 때에는,

다른 생각이나 다른 감정은 같이 존재하지 못한다.

그 순간에는 오직 그것밖에 없다.


이 것이 바로 부증불감이다.

생각의 속성이 하나밖에 못하므로,

마음 역시 하나밖에 실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화가 났을 때에는 화만,

슬플 때에는 슬픔만 싣는다.


즉,

생각과 마음이 꼭 맞는 사이좋은 부부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마음은 그 생각에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증불감이다.


만약에 마음이 생각보다 넓어서 한 생각을 싣고도 빈자리가 남아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이나 감정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두 가지나 세 가지를 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 위에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나 감정을 떠올릴 것이다.

즉, 한 순간에 우리는 여러가지 생각이나 감정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반야심경 앞의 편에서 누누이 이야기했다.)


정말로 우리가 만약에 그러하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생각에 치이거나 헷갈려서 말이다.


그리고,

사유의 과정을 세밀히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은 시차를 두고 하나씩 일어나지 절대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마음자리를(자성을)

매 순간 한 생각으로 꽉채우고 있기 때문이다.(부증불감)

그래서,

매 순간 하나의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오직 그것밖에 없는 절대적인 생각이어서,

비교하거나 분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늘 여여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생각은 마음의 바다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마음은 우리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바탕이 되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에 꼭 맞게 그렇게 받아준다는 것이다.

매 순간, 그리고 모두에게....

매 순간 마음에는(자성)

오직 한 생각으로만 꽉 채워져 있기 때문에

더할 것도 덜 할 것도, 늘일 것도 줄일 것도 없어서

부증불감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의 크기를 따지지 말라.

생각속에 담기는 그림들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한 생각이어서 한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고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한 생각이어서 한 마음의 범위를 넘어서 넘칠 수가 없다.


그래서 작아도 한 생각이요, 한 마음이요.

커도 한 생각이요 한 마음인 것이다.


부증 불감인 것이다.



자... 그리고,

여기 부증불감의 해설을

불구부정(不垢不靜)에 대입해보자,


마음은 청정하다고 했다.

그러면,

그 마음 위에 오직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만 일어난다면,(부증불감이라면)

그 청정한 마음위에 어떤 것이 오더라도 그것을 위해서 온전히 자리를 펴준다면?(부증불감이라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면?(부증불감이라면?)

그 자리 위에 마음껏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생각과 감정 역시 청정한 것이 아니겠는가?(부증불감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연이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 역시 말이다.(역시 부증불감)


다만 습이란 놈이(분별하는 마음이) 연이어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그것이 마치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리고는 앞에 일어나는 생각과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따로 보지 못하고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가지고 앞의 생각을 비교 분별하고는

옳으니 그르니 하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을 뒷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분별만 하지 않는다면

매 순간 우리의 삶은 오직 그것만의 삶을 살고 있으며,

우리의 청정한 본성 역시 오직 그것만의 삶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절대적인 맞춤 서비스를 하면서 편하게 받아주고 있는 것을 알 수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은

크다 작다, 옳다 그르다, 거룩하다 비속하다는

분별만 하지 않는다면,

각자 각자에게 매순간 삶이,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그래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오직 그것밖에 없는 청정하고 진정한 진리의 세계인 것이다.

분별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구부정한 청정한 자성의 부증불감한 모습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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