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반야심경

7. 불구부정

slowdream 2007. 9. 8. 05:56
 

반야심경 6. 불구부정(不垢不淨)


난 너무나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서 눈을 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내가 어릴 때에 한번 이사를 갔었는데,

이사를 간 곳에서 초등학교를 취학했던 기억으로 보아.

초등학교 취학하기 전에 이사를 갔었던 것 같은데

일은

이사를 가기 전의 집에서 일어났으니까,

아마 4 - 6세쯤이 아닌가 생각난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과 앞집은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었다.

앞집에 나와 나이가 같은 남자아이가 있어서 둘은 항상 같이 놀았다.


어느 날, 그 애는 내게 성에 대한 어떤 것을 가르쳐주고

행위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지만,

어린 나이에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마음에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그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웃집을 찾아갔고, 그 집 엄마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듯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 이 나이에 그 때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때의 장면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 때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때에 받은 충격이 꽤 컸나보다.

그 것이 큰 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성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도 함께....


그때부터, 나는, 성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관념도 없이,

성이 주는 쾌락을 알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집안에서 배운 윤리와 도덕적 관념과,

성인이 되면서 믿었던 카톨릭 교리로 강화된 성과 예의에 대한 상당한 윤리적 관념을 가지고 있는,

이중성격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성과 어릴 때부터 알아버려서,

어른이 되고 난 뒤에 배운 윤리와 도덕의 관념보다 앞서 뛰어나오는,

성욕이 내겐 너무나 큰 갈등이었다.


어릴 때에는 성에 대한 윤리적 관념이 없어서 그것이 왜 나쁜지 몰랐고,

다만 그 느낌이 주는 즐거움만 가지고 있었는데,

단지 어른들이 문제를 삼으니까,

어른 들 몰래 동네 아이들과 성을 즐겼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고 윤리와 도덕을 배우면서,

성에 대한 욕망은 윤리와 도덕관념 밑으로 가라앉았고,

표면적으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로 지냈었다.

그렇다고 성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엔,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갖고

미대를 다녔었는데,

예능을 하는 학생들은(다른 과목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보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술과 여자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자랑까지 하면서 몰려다니고

또 여럿이 사창가도 찾아가기도 하고 갔다온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해댔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는 그곳에 아무 거리낌 없이 가고 나보고도 가자고 하는 그들이 부럽고,

가고도 싶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의 굴레 속에서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는 것조차도 괴로웠다.

그래서,

대학 4년을 다니면서도 그러한 곳에 한번도 가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도덕적 관념을 지닌 것을 은근하게 자랑하고

동기들을 은연중에 깔보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학과 친구 중에 친한 친구가 거의 없다. (참으로 마음이 만들어낸 굴레라는 것이 사람의 환경까지도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 속은 성에 대한 동경과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생겨난 외로움에 편성하여서,

부드럽고 기댈 수 있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가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여자만 보면 성적인 그림으로 겹쳐지는 욕망

그리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으로 그것을 지우려는 갈등.....

그래서 성에 대한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하느님에게 빌었고,(난 그땐 참으로 독실한 신자였다. 누가 봐도... 지금 보면 내겐 종교적인 기질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성욕을 어쩌지 못해서,

좌절하던 나날이 많았다,

그러면 또 교회가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물론 사람이 한가지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24시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에 대한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문제보다도 그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더욱 성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윤리적인 도덕관념으로서도 막지를 못하는 성에 대한 유혹에 이끌리는 마음과,

또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평화와 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마음 또한 그 누구보다도 컸다.

그래서 더욱 종교에 매달렸지만,

매달릴수록 갈증만 심해졌을 뿐,

그 마음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 못했다.(물론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내안에 있는데,

바깥으로 찾으니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때에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는 종교인 카톨릭에서 뛰쳐나왔다.

아무리 기대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대학 일학년 때에 읽었던 불교 개론과 장자에서 얻은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는 철학쪽으로 돌이켰던 것이다.


중등학교 미술교사 시절.

동료교사들과 술집을 다니면서 내 속에 가라앉아 있던 성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집여성들과의 바람을 피우면서,

성에 대한 윤리적 관념이 서서히 엷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전통찻집을 하면서,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난 뒤에는,

혼자 사는 남자, 전직교사, 그리고 전통찻집이라는 고상한 장소를 운영하는 매력적인 남자로 비춰지면서,

많은 여자들이 내 주위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성에 대한 도덕적 윤리관념이 사라진 나는,

내게 다가오는 여자란 여자를 거리낌 없이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 쪽 구석에서는 그 뒷머리 잡는 괴로움이란.....


그 괴로움은 결국에는,

성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여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다음에는,

무슨 문제가 되랴?

하는 교묘한 합리를 끌어내었다.(참으로 마음이라는 놈은 교묘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심할 때에는 서 너명의 여인들과 동시에 만나면서,

입으로는 사랑한다는 달콤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직 성에만 집착하면서 탐닉했다.

(^^ 이러면 완전히 성도착자인 것 같아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모범적인 생활을 해나갔다.

남이 볼 때에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아마 그것은 윤리적인 집안에서 자란 탓과 종교적인 영향 덕분이었고.

그리고 그 덕분에 내가 지금의 내가 있게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르는 것처럼,

또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벼룩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윤리의식은 사라져버리고,

여자만 보면, 꼬실까? 하는 마음부터 들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여자를 꼬시는 능력도 나날이 성장을 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이중 성격중의 하나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이 강조되고,

누가 보아도 성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두 번째 아내를 만났고,

그 사람은 첫 번째 아내와 달리 나를 정말로 사랑했고,

나의 어떤 것도 다 받아주었으며, 순종적이고 착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런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면서도,


이미 뼈속 깊이 들어와 버린 그 바람은 잦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내의 주위의 여인들과도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참으로 마음이란 놈은 한번 집착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또 교묘히 합리화 시켜서 죄의식까지도 없애주는 것이다.)

그 바람으로 인하여 두 번째의 아내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녀가 떠나가면서 하는 말,


"당신은 모든 것을 알면서 그것을 이용해 먹어!"


이 한마디에 난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내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내 눈에서 정말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날부터,

나는 나의 과거를 역순으로 되짚어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잘 한 것은 빼고 감추고 싶었던 나의 치부를 하나씩 드러내며 적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6절지 시험지를 150여장을 앞뒤로 깨알같이 빼곡이 적고도 내 인생의 삼분의 이도 적지 못한 것이었다.

아.......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차라리 인격파탄자의 삶이었던 것이었다.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그러면서 겉으로는 도덕 군자처럼 남들에게 사서삼경도 무료로 가르치고,

수지침도 가르치고, 탈춤도 무료로 가르치며,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배운 좋은 말과,

도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배운 불교와 도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말들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러한

내 마음 속에서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대한 진정한 애정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훈장을 잔뜩 붙이고 있었으며,

그 행동을 드러내지 않으며 교묘하게 자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내가 한 말과 다른 행동을 할 때에는 또 교묘하게 자신을 합리화시키고는,

그러한 나를 은연중에 대단한 사람처럼 다른 이에게 인식시키고

거룩한 말들로 교묘하게 여자들이나 꼬시고 다니는 삶 투성이었던 것이다...


아........

내가 써 놓고도 차마 내가 읽을 수가 없는,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는 그러한 삶이었다.


그 때부터 난 펜을 던져버리고는,

고통스러운 참회의 삶이 시작되었다.


과거를 뉘우치고 또 뉘우치고...

뉘우쳐도 뉘우쳐도, 그 마음의 교활한 모습을 드러내며,

"그래도 잘한 일도 많잖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괴로워해?

그래도 지금 나가도 넌 착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남을 위해서 무료로 많은 것을 주고,

또 이해심이 많아서 남들이 어떻게 하던지 다 받아주잖아?

잘한 일도 많아..."

하는 꼬드김과 참회의 밑바닥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다른 마음.......

그러면서,

그 딱딱한 마음이 괴로워서 자신을 쥐어뜯고,

다시 고개를 드는 합리화의 교묘한 마음들의 싸움들...

이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거의 4개월을 울고 다녔다.

그 당시에도 택시를 하였었는데,

하루에도 수 백번 올라오는 그 교활한 마음에 구역질하면서,

길가의 전봇대나 가로수나 벽에 콱 쳐박아 죽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손님이 없을 때에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손님이 타면, 그냥 울면 될 것인데,

또 그 사람을 의식하여서 잘난 사람이 되려고 마음의 교활함에 넘어거가서,

언제 울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워다주고... 하하하하... 참으로 내가 내가 아닌,

그러한 삶이 계속 되었다.


그렇게 울고 울고, 또 뉘우치고 뉘우치며 자신을 쥐어뜯으며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 이 모든 것이 한 놈이 하고 있구나!"


하는 각성(覺醒)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다!

문득 일어난 그 한 생각!


모범적인 삶의 기준을 만든 놈도 마음이요.

그것을 어기는 놈도 그 마음이요.

어긴 놈을 채찍질하는 놈도 그 놈이요.

채찍질에 뉘우치며 우는 놈도 그놈이요.

울다가도 고개를 들어서 합리화를 하는 그 딱딱한 놈도 역시 그 놈이요.

딱딱한 마음에 부딪혀서 '아! 정말 나는 안되는 놈이야!' 하고 쥐어짜는 놈도 똑 같은 그 놈이라는 것을 안 그 한 생각!


그 한 생각으로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을 한 놈이 짓고 무너뜨리고 세우고 털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쌓아온 기억덩어리인 습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분별하는 그 마음 말이다.


그 놈이 늘 새롭고 옳고 그름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자신이 축적해 놓은 기준에서 판단하여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그르니 하면서,

항상 지금을 살게 하지 못하고,

지금에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바람직한 어떤 가치를 향해 가도록 잡아서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하고 늘 과거의 상에 머물도록,

우리를 한번도 쉬지 못하게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의 실체를 나는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의 교묘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냥 드는 마음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놈이 그놈이니, 마음 안에서 아무리 마음을 고쳐봐야 그 마음이니,

결국 옛 선사들이 말하는 '물로 물을 씻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이 될 수 없으니

그 마음을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그러자, 그 때부터 분별하는 마음은 서서히 내게서 사라져 갔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가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참회를 해도,

실타래같이 꼬여서 끝간데 없이 자신을 쥐어뜯어도 뜯어도,

그 사라지지 않던 그 죄업이,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내게는 죄가 애초에 없으며,

그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참으로 많이 자유로워지고 편해졌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이란 습이 끈질긴 놈이어서

그래도 남은 것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아버린 성(性),

그래서 그것을 탐닉한 세월만큼 세포 곳곳에 존재하고 있던 그 성에 대한 욕구,

그리고, 그 성욕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회한과 죄책감 등으로,

성에 이끌리는 마음이 오래된 만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죄책감 역시 컸기에,


마음을 내버려두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성에 대해서만큼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나를 누르고 있었다.


여전히 지나가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또 그 부담스러운 마음이 다시 성욕을 문제삼아서,

성욕을 일으키고, 그 일어나는 성욕으로 인하여 또 괴로워하고...

여자들과 이야기하면 어떻게 시선을 둘지도 몰랐고,

일어나는 그 마음과 싸우느라고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삶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마경(維摩經)을 읽다가 눈에 확 뜨이는 한 구절!


유마경 제자품(弟子品) 앞 부분에 수보리(須菩提)가 탁발을 나가 유마를 만났을 대에,

유마가 수보리에게 하는 말이다.


"若須菩提야 不斷淫怒癡하고 亦復與俱하며 不壞於身하고 而隨一相하며 不滅癡愛하고 起於明脫하며"

(약수보리야 부단음노치하고 역부여구하며 불괴어신하고 이수일상하며 불멸치애하고 기어명탈하며)


以五逆相으로 而得解脫하되 亦不解不縛하며 不見四諦나 非不見諦며 非得果나 非不得果며

(이오역상으로 이득해탈하되 역불해불박하며 불견사제나 비불견제며 비득과나 비불득과며)


非凡夫나 非離凡夫며 非聖人이나 非不聖人이며 雖成就一切法이나 而離諸法相이라사 乃可取食이니라."

(비범부나 비이범부며 비성인이나 비불성인이며 수성취일체법이나 이이제버상이라사 내가취식이니라.)"


해석하면,


"수보리야, 만약에 음란 성냄 어리석음을 끊지 않고 또한 더불어 함께 하지도 않으며,

몸을 망가뜨리지 않고 한 모습에 따르며,

어리석음과 좋아 따름을 멸하지 않고 삼명과 해탈을 일으키며,

오역상으로 해탈을 얻되, 또한 풀지도 않고 얽매지도 않으며,

사제(고집멸도 - 苦執滅度)를 보지도 않으나 사제를 보지 않음도 아니며,

과를 얻음도 아니나 과를 얻지 않음도 아니며,

범부도 아니나 범부를 여윔도 아니며,

성인도 아니나 성인이 아님도 아니며,

비록 일체 법을 성취하나 모든 법상을 여윔이라야

이에 가히 밥(탁발)을 취할 만 하니라."


이 구절을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선생께서는 이렇게 해설 하셨다.


"첫째,

음탕함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좋아서 좇으려하는 자는 범부지견이니 천치라 하겠고,

음탕함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딴 것으로 보아서 끊으려는 자는 이승도리(二乘道理)이니 바보라 하겠다.

그러나 도인은 음탕함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인 그 성품이

바로 계(戒), 정(定), 혜(慧)인 성품으로 알기 때문에

끊으려하지도 않고 갖추려 하지도 않으니,

이러히 끊지도 않으면서 끊고, 끊으면서 끊지 않음이 참 끊음인줄 알아야 한다.

(즉, 不離 不染-불리 불염, 떨어지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오음신을 돌이켜서 일상임을 알지 못함은 범부의 지견이니 천치라 하겠고,

오음신을 뭉개어서 일상으로 앎은 이승도리니 바보라 하겠다.

그러나 도인은 오음이 바로 일상의 놀이인 줄로 알기 때문에 오음을 뭉개지 않고 일상을 따른다.


셋째,

어리석음(癡)과 사랑함(愛 -치우침)은 두 가지 밝지 않음(無明)을 낳으니

이러기에 어리석지 않으면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인 삼명(三明)을 얻고,

치우치지 않으면 해탈(解脫)을 얻는다.


이러한 까닭에 어리석음과 치우치는 마음을 둔 채로 명탈(明脫 - 삼명과 해탈)을 일으키지 않음은 범부지견이니 천치라 하겠고,

어리석음과 치우치는 마음이 꺼진 뒤를 기다려서 명탈을 일으킴은 이승도리니 바보라 하겠다.

그러나, 도인은 어리석음과 치우치는 마음인 그 성품이 바로 삼명과 해탈인 성품으로 알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치우치는 마음을 없애지 아니하고 명탈을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

오역(五逆)은 그 죄(罪)가 너무나 크며,

해탈(解脫) 그 도(道)가 수승(殊勝)하니,

오역을 갖춘 채로 해탈을 바라지 아니하는 자는 범부지견의 얽힘에 매인지라 천치라 하겠고,

오역을 죄라 하여 없앤 뒤에 해탈을 얻으려는 자는 이승도리의 풀림에 매인지라 바보라 하겠고,

그러나, 도인은 오역인 그 성품이 바로 해탈인 성품으로 알기 때문에 얽힘이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풀림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진실한 도리를 보지 않는 자는 범부의 지견이니 천치라 하겠고,

진실한 도리를 딴 것으로 보는 자는 이승도리이니 바보라 하겠고,

그러나 도인은 평등으로 관(觀) 하되,

만약 범부가 진실한 도리를 보지 않더라도 생사에 들지 아니하며,

만약 이승이 진실한 도리를 보아도 도과(道果)를 증명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이에 범부가 아니나 범부법을 여의지 않으며,

비록 성인이 아니나 성인법을 여의지 않는 까닭으로,

이에 일체법을 이룩할지라도 모든 법상(法相)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바야흐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글이 순간 나를 구제한 것이었다.


그러하였다.


나는 다른 것에는 도인의 도리를 알았고, 그것을 내치거나 따라가지도 않고,

그것으로 살았지만,

다만 성욕만은 이승의 도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일어나는 마음을 성욕이라고 문제를 삼게 되고,

문제를 삼으니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데,

끊임없이 일어나니,

내 자신이 죽도록 미웠던 것이었다.


그 후부터,

성욕이 일어나도,

그것을 따라가거나 내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어남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리고 그 마음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는 놈이니,

이내 다른 마음이 들어와서 성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은 길을 가면서 여자를 보거나,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이쁘다, 섹시하다, 날씬하다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설사 성욕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마음을 내어 치거나 따라가려는, 즉 어떻게 하려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뿐이다.

그것을 문제삼고 나를 쥐어뜯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냥 순간에만 살뿐이었다.

그냥 현재의 머무름 없는 마음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었던 여정이 끝난 것이었다.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서 또 그것과 함께 살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아서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해진 것이다.


길게 썼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

유마경에서 말하는 음욕과 노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오욕칠정이 없애거나 따라 가야할,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때로는 해가 비치고, 번개가 치는,

자연현상과 같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일 뿐이다.


우리에게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이성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 것인가?


성에 대한 관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에 대한 관심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삼는 분별하는 그 마음이,

그냥 일어났다 사라질 것을 붙잡고,

사라지지도 못하게 만들고,

또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더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냥 다른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내버려두면,

그것은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고 살다가 갈 것이다.


성냄도 마찬가지요,

짜증도 마찬가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요.

등등의 모든 것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냥 자연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쓰는 지혜의 도구일 뿐이다.


우리에게 오욕칠정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사랑을 하며,

남의 잘못(분별)을 꾸짖어주며,

남을 잘못에서 구해줄 것인가?

또 게으름이 없다면,

어찌 피곤한데도 쉴 수가 있겠는가?

또 남의 게으름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품일 뿐이다.


다만,

그것을 분별하여서,

어떤 것은 좋다하고,

어떤 것은 나쁘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집착과 외로움을 더 만들어 내어서,

쾌락을 추구하게 하고,

고통을 싫어하게 하여서,

쾌락은 끊임없이 찾도록 하고,

고통에서는 죽으리만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래의 모습에는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러울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구부정(不垢不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를 낼 때에는 화밖에 없으니 그것을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분별이 없다.

짜증을 낼 때에도, 원망을 할 때에도,

사랑을 할 때에도, 웃을 때에도,

그리고 성욕이 일어날 때에도,

다만, 그것 밖에 없다.


그러니, 그곳에 무슨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단 말인가?


다만, 그러한 것을 뒷 마음이 그것을 분별하여서,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며 판단할 뿐이다.

그리고 그 판단하는 마음은 현재의 잣대가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 속의 산물이지,

지금의 것과는 맞지도 않는 잣대가 아닌가?

과거의 기억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꺼집어내어서 비추어보니,

화가 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

그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그냥 새롭게 일어난 그러한 현상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감정과 생각과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싣고 있을 뿐,

그것에 조금도 물들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해도,

하늘에는 조금도 구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만약에 물든다고 한다면,

화가 일어나서 화에 물들어 있어서,

어찌 그 다음에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담길 수가 있겠는가?

하늘에 구름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면,

어찌 다른 구름의 모습이 그 속에 생길 수가 있으랴?

우리의 마음(자성)이 공한 이치가 또한 이러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제법(諸法) 또한 공상(空相)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인 것이다.


다만, 문제를 삼는 그 분별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럽게도 하고 깨끗하게도 할 뿐이다.

본래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마음이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그것에 물들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그곳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청정이라는 말은

더럽다는 말의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더럽다 깨끗하다는 양변을 여윈 것이기에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불구부정하기에 청정한 것이다.

우리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 역시,

분별이전의 것이요, 양변을 여윈 것이기에 청정한 것이다.



다만 그 분별하여 문제삼는 마음만 쉬라,

그리고 분별하는 그 마음 또한 내 버려 두라

쉬라는 말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즉, 일어나는 대로 인정하고 무심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어떻게 해서 내어 치거나 따라가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냥 스스로 살다 사라지게 놔두라는 것이다.


진정한 수행은,

더러움을 없애어서 깨끗함으로,

미움을 제거하여 사랑으로,

게으름을 채찍질해서 성실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별하여 어떻게든 내어 치거나 따라가려는 그 마음을 내버려두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이

그 한 생각을 놓아라,

또는 마음을 쉬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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