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반야심경

9. 공중무색

slowdream 2007. 9. 8. 05:59
 

반야심경 8 - 공중무색(空中無色)


시고로 공중무색이요 무수상행식이요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이니.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이니


“그러므로 공중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 미촉법도 없고 안계와 의식계도 없느니라.”



앞에서 우리는,

세상의 삼라만상과 자성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하다는 것은

수많은 인연들이 오고 가면서 삼라만상의 색을 만들어내나,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여서 잡을 수가 없으니 ‘삼라만상이 공’하고,


잡을 수가 없어서 오직 그 순간만이 실재하니,

오직 그것밖에 없어서 절대적이니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이 공’하고,


수많은 것이 일어났다 사라져도 조금도 물들거나 흠집이 없으며,

그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받아주니 ‘자성이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잡을 수가 없으니 이 것이다 할 것이 없고,

이 것이다 할 것이 없어서 한 물건도 없으니 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不生不滅)


오직 그것 밖에 없어 절대적이니 분별할 수가 없어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하고,(不垢不淨)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있어서 항상 그것과 함께 하나 그것에 물들지 아니하니,

늘거나 줄어듦도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지도 아니한다.(不增不減)


그러므로,

공(空)에는 색(色)이라는 것이 없다.


이것을 좀더 세밀하고 분석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반야심경 2편의 해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의식작용이라는 것이,

그것을 행할 때에는 항상 행하는 주(主)와 객(客)이 없다.

여기서 행이라는 것은 사고 작용까지도 말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무엇을 본다.” 할 때에는

나라는 주체와 무엇이라는 객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무심히 보는 그 순간에는,

나의 의식 속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

그냥 보이는 대상만 있다.

나의 의식 속에 대상만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보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보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말은 나와 대상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이 잠시도 머물지 않듯이 우리의 의식구조도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또 마음은 항상 하나의 생각밖에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할 때에는 행함만 있지 그것을 행하는 주와 객이 없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본다” 하고 느낄 때에는

내 의식 속에는 대상은 사라져버리고,

‘보는 나’(육근, 육식 : 六根六識)라는 것이 대상이 되어 있다.


* 육근(六根)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육식(六識) :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는 대상을 고정시켜서 내 것으로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보는 대상을 고정시켜서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은

대상이 고정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우리의 의식구조나 세상의 이치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에

의식하는 내가 고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계속 바뀌니

그것을 취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 할 때에는 이미 얻으려는 내가 대상이 되어 버려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얻으려는 내가 되어 버리니,

얻으려고 했던 처음의 보이는 대상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은 한 가지 생각밖에 실을 수가 없고,

또 생각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므로,(생각도 대상이므로)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이미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자신의 인식과정을 조금만 세밀히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깥 대상인 육진(六塵) 즉, 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을

그것을 인식하는 통로인 육근(六根)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접촉하여

즉,

모양(色)은 눈(眼)이,

소리(聲)는 귀(耳)가,

냄새(香)는 혀(舌)가,

느낌(觸)은 몸(身)이

바깥 대상의 일체의 모든 것(法)은 의근(意根)이

육식(六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촉이라는 것은 사근(안이비설)이외의 신체부분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안이비설’도 역시 신체이므로, 모든 바깥의 대상은 촉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우리의 인식의 근거가 되는 대부분의 것이 사근 -안이비설- 에 의한 것이 많으므로 세밀하게 오근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法’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만물을 말하는 것으로 ‘색성향미촉’으로 된 모든 것을 말하고, 세상만물을 통틀어서 종합하여 인식하는 통로를 ‘意’ 라고 한다.)


이 육진과 육경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고 하고,

십이처에 육식을 합하여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한다.


그리고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라고 한 부분에서

안계(眼界)라고 하는 것은

육경(六境)중에 하나인 색경(色境)과 육근(六根)중의 하나인 안근(眼根)과 육식(六識)중의 하나인 안식(眼識)이 인연되어서 화합하게 되면,

눈(眼)을 중심으로 하나의 셰계가 이룩되는데 이것을 안계(眼界)라고 한다.

나머지 오경과 오근과 오식의 화합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것은 십팔계가 화합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최종단계인 의식계를 말하는 데

이 의식계를 우리는 보통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나 인줄 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육근을 가지고 있고

그 육근을 통해서 바깥의 세계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십팔계가 형성되지만)

그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비추는 그것’이 없으면

스크린과 필름만 있지,

그것을 비추게 하는 빛이 없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나타내거나 알아볼 수가 없는 것과 같아서,

육진과 육근이 있다고 하더라도,

육근을 통해 육진을 비출 수 있는 성품이 없으면

육식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십팔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성품이 없으면 색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요.

그 성품이 바로 ‘비추는 그것’이요, 진정한 나인 것이다.


그리고,

육진과 육근을 통해서 육식을 일으키는 과정을 오온(五蘊)이라고 하여서,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을 말하는데.

이 오온이라는 것에 과정이 있다는 것은

바로 끊임없이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머물지 않고 흘러가니 공하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앞부분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오온의 과정에 의해서 십팔계가 형성되니

십팔계 역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어서 한번도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마음이란 놈은 의식계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어서,

자신이 머물고 있다고 착각을 할 뿐이다.


그래서


“그러므로 공중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안계와 의식계도 없느니라.”


고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실상을 이야기 한 것이나,

너무나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이야기에 가까우니,

이 것을 우리의 실제의 삶으로 돌아와서 풀이를 해보아야만

반야심경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품이 바로 나이며,

그 성품이 바로 자성이요,

자성이 공하니


공중무색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것은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을 말하는 세상은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내가 무엇을 얻으려할 때에는

이미 얻으려하는 그것이 사라지고 없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취할 수가 없으며,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서,

그 순간에는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

비교할 수가 없어서

서로 비교하여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을 버리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공중무색(空中無色)이다.

즉,

나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이요.

또,

모든 것이 매 순간 그것밖에 없으니,

분별할 수가 없어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고 할 무엇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공이 나라고 했고,

색은 세상 만물과 우리의 내면과 의식구조와 생각까지 다 포함하고 있는데,

삶은 매번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 잡을 수가 없어서

무색이라고 했으니,

분별하여서 이것이 좋으니 저것이 나쁘니 할 것이 없다.

따로 귀하다 하여서 취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좋다 하여서 취할 것도 없고

저것이 나쁘다 하여서 버릴 것도 없으니

공중무색(空中無色)이요,


분별하여서 따로 귀하게 여길 것이 없어서,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어서 구별하여 받아들일 것이 없으니 무수(無受)요,

받아들인 것에 있어서 특별하게 여길 것도 없으니 무상(無相)이며,

그러므로 특별하게 이것이 좋은 행동이니 저것이 좋은 행동이니 하고 고민할 것이 없으니 무행(無行)이요,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릴 것이 없으니 따로 기억하여서 의식할 것도 없으니 무식(無識)이니,

무수상행식(無受相行識)이다.


그러니 또,

따로 좋은 모양을 골라 볼 것도 없고,

따로 좋은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고,

따로 좋은 냄새를 맡으려 할 필요도 없고,

따로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할 필요도 없고,

따로 좋은 스킨쉽을 하려 할 필요도 없으니,

따로 뜻을 가지려 할 필요도 없어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인것이며,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니

따로 좋은 모양이 없고,

따로 좋은 소리가 없고,

따로 좋은 냄새도 없고,

따로 좋은 맛도 없고,

따로 좋은 느낌도 없어

따로 귀하게 여겨서 찾아야할 법이 없어서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다.


그래서,

색과 눈으로 생긴 안식(眼識)으로 이루어진 눈의 세계(안계(眼界))에

따로 좋은 것이라고 저장할 잣대가 없으며,

이에 다른 사계(四界 : 귀, 코, 혀, 몸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오계를 통해서 총괄하는 의식계 역시 분별하여서 이것이 좋다 저것이 나쁘다하고,

잣대를 세울 수가 없으니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인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나가는 귀한 것이므로,

그렇게 매 순간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이 홈페이지의 그림 밑에 조그만 글씨로 쓰여진 글처럼


“세상엔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따로 찾을 진리가 없다.”


는 말처럼

어떤 것은 좋아서 취해야 하고,

어떤 것은 나빠서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분별하지 않고,

바깥의 삶이나 내면의 생각을 내치거나 따라가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공중무색(空中無色)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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