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의 요체를 풍부하게 담은 <서장(書狀)>에서 소담 나름대로의 견처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몇몇 단락들을 옮겨봅니다. 인용도서는 <서장>(무비[無比]스님 감수, 지상[智象]스님 주해 / 불광출판사 펴냄)입니다.
서장(書狀) 해제
<서장>은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스님께서 주로 사대부들에게 ‘선(禪) 공부에 관한 여러 가지 요지’를 대답해 준 편지글로서, 그의 제자 혜연이 기록하고, 정지거사 황문창이 중편한 것으로, <대혜어록> 30권 가운데 25-30권에 해당되며, 본래의 제목은 <대혜보각선사서>이다.
대혜선사행장
선사는 선주 영국현 사람이니, 성은 해(奚) 씨였다. 어머니 꿈에 신인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얼굴은 검고 코는 오똑하였다. 침실에 이르렀기에, 그 스님의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이라고 말하였다. 잠을 깨고 보니 태기가 있어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찬란한 빛이 방을 비추니, 온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기이하게 여겼다. 이 해가 곧 남송의 철종 원우 4년 기사십일월십일사시에 태어났다.
스님의 휘(諱)는 종고이니, 나이 십삼세에 향교에 입학하여 같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벼루를 던지고 놀면서, 잘못 선생의 모자를 맞히고는 일금 삼백으로 보상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세간의 서적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궁구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였다.
십육세에 동산혜운원 혜제대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십칠세에 머리를 깎아 구족계를 받고, 십구세에 제방으로 행각하다가 태평주의 은적암에 이르러니 암주가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가람을 보살피는 신장이 부촉하여 이르되, ‘다음날 운봉열선사께서 이 절에 오신다’ 하더니, 그대가 맞지!” 하고는 곧 열선사의 어록을 그에게 보였더니 스님이 한 번 보고는 암송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운봉스님의 후신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조동의 스님들을 뵈옵고 그 종지를 얻었으나 스님께서는 오히려 만족하지 않고, 휘종 대관 3년 기축에 잠당무준 화상을 뵈옵고 칠년 동안 시봉하고는 큰 깨우침이 있었으나, 잠당이 임종할 때에 “원오극근 선사를 지시하면서 대사를 꼭 성취하라” 하였으므로, 스님께서 선화 4년 임인에 원오선사를 뵙고자 하였으나, 때에 선사께서 멀리 장산에 계시었기 때문에 잠시 태평사의 평보융 스님의 휘하에 의지하였다.
선화칠년 을사에 처음 원오극근 선사를 변경의 천녕사에서 뵈옵고 겨우 사십 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원오선사께서 개당하여 이르시되, “어떤 승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느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신 것입니까?’ 운문이 대답하기를, ‘동산(東山)이 물위를 감이니라.’고 하였지만 나는 곧 그렇지 아니함이니 오직 그를 향하여 말하되, ‘따뜻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처마끝에 시원한 바람이 생하느니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그 법문을 듣고는 홀연히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거늘, 원오선사께서 택목당에 머물게 하여 시자 소임도 맡기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보임하게 하였다. 후에 원오선사의 방 가운데에서 어떤 승이 묻기를 “있다는 글귀와 없다는 글귀가 마치 덩굴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께서 드디어 묻기를 “듣자오니 화상께서 당시 오조법연 선사와 함께 있을 때에 일찍이 이 말을 질문했다고 하니,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원오선사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거늘, 스님께서 이르되, “화상께서는 이미 대중들의 물음에 대답하셨거늘, 지금 다시 말씀한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원오선사가 마지 못하여 이르시되, “내가 오조에게 묻되 ‘있다는 글귀와 없다는 글귀가 마치 덩굴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뜻이 어떠함이닛고?’ 하였더니, 오조께서 이르시되 ‘그림으로 그리려 하나 또한 그려서 이룰 수 없고, 채색하려 해도 채색해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묻되 ‘나무가 쓰러지고 덩굴이 마를 때에는 어떻습니까?’ 하니, 오조께서 이르시되, ‘서로 따라서 오도다.’고 하였다.” 하시니, 스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활연히 크게 깨닫고 이르되, “제가 알았습니다.”하자, 원오선사께서 몇 가지 인연을 들어서 그를 시험하여 물었으나, 모두 대답하여 막힘이 없거늘, 원오선사가 기뻐하면서 이르되 “내가 너를 속이지 않았다”고 하시며, 이에 임제의 정종기를 지어주면서 기실을 맡기거늘 스님께서 이에 원오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오선사께서 촉으로 돌아가거늘 스님께서는 곧 자취를 감추고 토굴에 기거하면서 결제하시었다. 뒤에 여름을 호구사에서 보내면서 <화엄경>을 열람하다가 제칠지보살이 무생법인을 얻은 곳에 이르러, 홀연히 잠당이 보인 바의, 앙굴마라 발우를 지니고 산부를 구했다고 하는 인연*을 명확하게 밝히었다.
소흥칠년에 천자의 부탁으로 경산사에 거주하였는데, 하루는 원오선사의 부음이 이르렀거늘, 스님께서 몸소 글을 지으시고 제에 나아가니, 곧 저녁의 소참법문에 어떤 스님이 장사(長沙)에게 묻되 “남전(南泉)이 천화함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갔습니까?” 장사선사가 이르되 “동쪽 마을에서 나귀가 되고 서쪽 마을에서 말이 되도다.” 승이 말하기를, “무슨 뜻입니까?” 하니, 장사선사가 이르되 “말을 타려면 곧장 타고 내리려면 곧바로 내려라.” 하였지만, 만약 경산(대혜의 별칭)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 어떤 승이 묻되, “원오선사께서 천화함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갔습니까?” 하면, 곧 그를 향하여 말하되 “대아비지옥을 향하였느니라.” “어떤 뜻입니까?” 하면 말하기를 “배고프면 구릿물을 먹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시니라.”고 하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구제할 수 없습니까?” 하면, 대답하되 “구할 사람이 없도다, 무엇 때문에 구하고자 하나 구할 수 없는가? 이 늙은이가 평상시에 차 마시고 밥 먹는 도리이니라.” 하리라.
십일년 오월에 간사한 재상인 진회가 스님을 장구성과 무리를 짓는다고 모함하여 진회의주청에 의하여 의복과 계첩을 빼앗고 형주에 십오년 동안 귀양 보내니, 이십육년 시월에 칙명에 의하여 매양으로 옮겼다가 얼마 있지 않아, 그 형복을 회복하고 석방되어 십일월에 아육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십팔년에 임금이 스님으로 하여금 경산사에 머물면서 원오선사의종지를 크게 펼쳐주었으면 하는 뜻을 보이므로, 그로 인하여 도법의 번창함이 그 당시에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또한 대중들도 이천 명이 넘었다.
신사년 봄에 주지의 소임을 놓고 명월당에 기거함이러니, 이듬해 임오에 임금이 대혜선사라고 직접 호를 하사하였다. 효종의 융흥원년 계미에 명월당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한 별똥이 아주 밝은 빛을 내면서 경산사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대중들이 보았다. 스님께서 그로 인하여 조금 몸이 불편함을 보이다가 팔월 구일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튿날 가겠다” 하더니, 그날 저녁 네다섯시쯤에 유표를 손수 쓰시고 아울러 뒷일을 부탁하니, 요현이라고 하는 승이 게를 청하자, 스님께서 특별히 쓰시어 말씀하시되 “삶 또한 그렇고 죽음 또한 그렇거늘, 게가 있고 게가 없는 것이 이 무슨 뜨거운 열기인가?” 하시고 태연하게 입적하시니, 세상의 나이는 칠십다섯이요, 법랍은 오십여덟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를 보광(普光)이라고 하사하시었다. 지금은 살아계실 때의 호와 입적하신 후의 시호를 들어서 대혜보각이라고 한 것은, 남악양화상의 호가 또한 대혜이기 때문에 그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팔십권의 어록이 대장경을 따라서 유행하고, 그의 법을 이은 사람들이 팔십삼인이나 된다.
*앙굴마라가 성에 들어가 탁발하다가 한 장자의 집에 이르렀다. 마침 그 집 며느리가 해산을 하다가 난산을 만나 죽게 되었다. 장자가 말하기를 “사문은 불제자이니 좋은 방법으로 우리 며느리를 구출할 도리가 있을 것이다.” 하고 그 방법을 청하였다. 앙굴마라가 말하되, “나는 이 방법을 알지 못하니 부처님께 물어서 가르쳐주겠다”하고 부처님께 여주었더니, 부처님께서 대답하기를 “네가 속히 가서 설교해 주되 ‘내가 성현의 법을 만난 이후로는 아직 살생하지 않았다’고 하라” 하였다. 앙굴마라가 부처님의 지시대로 곧 가서 설법하였더니 부인이 설교를 듣고 즉시 분만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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