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서장(書狀)

증시랑에게 답하는 글, 두번째

slowdream 2007. 10. 9. 15:56
 


증시랑에게 답하는 글, 두번째


그대가 몸을 부귀에 머물되 부귀에 꺾이어 난처한 바가 되지 아니한 것은, 예로부터 지혜의 종자를 심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다만 중간에 이 뜻을 잊고 이근(利根聰明)총명의 장애가 되어, 고인께서 곧바로 끊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친 요긴한 곳에서 한 칼로 두 동강 내어 바로 그 아래에 쉬지 못할까 능히 염려하나니, 이 병은 어진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참구한 납자들도 역시 그러하여, 허다하게 즐거이 한 걸음 물러나 힘 더는 곳에 나아가서 공부를 지으려 하지 않고, 다만 총명과 의식. 계교. 사량으로써 밖을 향하여 쫓아 구하다가, 잠깐 선지식이 총명과 의식. 사량. 계교하는 그 밖을 향하여 본분활구를 보이는 것을 듣고, 허다히 면전에서 잘못된 견해로 지나쳐 버리고는 말하기를, “옛부터 고덕들이 실다운 법을 사람에게 줌이 있다”라고 하나니, 저 조주의 방하착(放下着)과 운문의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암두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경계를 물리침이 으뜸이 되며, 경계를 따라감이 아래가 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대개 으뜸이 되는 종취는 마땅히 언구 알기를 요함이니, 어떤 것이 언구인가? 온갖 것을 사량하지 않을 때를 정구(正句)라고 부르며, 또 거정(居正)이라 이르며, 득주(得住)라 말하며, 역력(歷歷)이라 말하며, 성성(惺惺)이라 말하며, 임마시(恁麽時)라고 말한다. 이러한 때에 나아가 모든 시비가 가지런히 깨짐이니, 자칫 이렇다 하면 곧 이렇지 못함이라, 옳은 글귀도 깎아버리고 그른 글귀도 깎아버려 마치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닿기만 하면 곧 불타버림이라, 무슨 가까이 할 곳이 있으리오?”라고 하시니, 지금의 사대부들이 허다히 사량. 계교로써 안식처를 삼아서 이렇게 말함을 듣고 곧 말하기를,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하나니, 마치 배가 뒤집어지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물에 뛰어내려감과 같아, 이는 몹시 가련하고 불쌍함이로다.


요즘 강서에 이르러 여거인을 만났더니, 거인이 마음을 한 조각의 인연에 머물러 �이 매우 오래되었어도 깊이 병이 있는지라, 그가 어쩌 총명하지 않으리오만 내가 일찍이 그에게 묻되 “자네가 공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니 능히 두려워함을 아는 자는 공한가, 공하지 않는가? 시험삼아 일러보아라.”고 하니 그가 우두커니 생각하면서 계교하여 공경히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때에 문득 한번 “할(喝)!” 하니, 지금까지도 어리둥절하여 유래를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함이로다. 이는 모두가 깨달아 증득함을 구하는 욕심이 앞서 문득 놓여 있으므로 스스로가 장애와 어려움을 지을 뿐이요, 다른 일이 있어 간여됨은 아니다. 그대는 시험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서 세월이 흘러가면 자연히 댓돌 맞듯 맷돌 맞듯 하려거니와,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가져 쉬기를 기다리고자 할진대, 처음부터 참구하여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까지 공부하여도 또한 깨달을 수가 없으며, 또한 쉴 수도 없어 더욱더 헤매고 번민함만 더할 뿐이다.


평전화상이 말씀하시길 “신령스러운 광채가 혼매하지 아니하여 만고에 훌륭한 법이니, ‘이 문을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入此門來莫存知解)’”라고 하시며, 또 고덕[우두융선사]이 말씀하시기를 “이 일은 유심으로도 구할 수 없으며, 무심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으며, 적묵으로도 통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진흙에 들고 물에 들어서 노파가 손자를 염려하듯 간절한 말씀이거늘, 가끔 참선하는 사람이 다만 이렇듯 생각으로만 지나쳐 버리고 자못 “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만약에 힘줄과 뼈가 있는 놈인댄 애오라지 듦을 듣고는 곧바로 금강왕보검을 잡아 한칼에 잘라버림에 네 가지 길[유심. 무심. 언어. 적묵]의 갈등이 꺾어 끊어져버리니, 곧 생사의 길도 또한 끊어질 것이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길도 또한 끊어질 것이며, 계교하고사량함도 또한 끊어질 것이며, 득실시비도 또한 끊어지므로, 본인의 서 있는 곳이 깨끗하기가 물 뿌린 듯하며 붉기가 벌거벗은 듯하여 붙잡을 수 없으리니, 어찌 통쾌하지 않으며 어찌 시원하지 않겠는가?


보지 못했는가? 옛적에 관계화상이 처음 임제선사를 처음 참례하였을 때 임제선사께서 관계화상이 오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승상에서 내려와 갑자기 멱살을 움켜쥐니, 관계화상이 바로 말하기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하니, 임제선사께서 그가 이미 깨달았음을 아시고 곧바로 떠밀어내고, 다시는 언구로 그와 함께 상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관계화상이 어떻게 사량계교로써 삼가 응대하였겠는가? 예부터 옴으로 다행히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었는데도, 요즘 사람은 모두 다들 가져서 일로 삼지 아니함은 다만 조폭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관계화상이 애초에 만약 한 군데라도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증득하기를 기다리며, 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바로 앞에 있었더라면, 멱살을 움켜쥠을 당하고 문득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곧 손발을 묶고 사천하를 돌아쳐서 한 번 만나더라도 또한 깨달을 수 없으며, 또한 쉴 수가 없을 것이다.

평상시에 계교하여 꿰어맞춤도 식정(識情)이며, 생사를 쫓아서 옮겨다님도 역시 식정이며, 두려워 무서워하며 어쩔 줄 모름도 역시 식정이거늘, 요즘 참선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만 있어서 머리를 출몰하나니, 교(敎) 가운데는 “식을 따라 행하고, 지를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을 어둡게 함이니, 만약 혹 한때라도 잠시 놓아버릴 수 있게 하여, 온갖 것을 사량. 계교하지 않는다면 홀연히 식정의 다리를 잊어 본분을 밟게 되리니, 곧 이 식정이 문득 ‘진공묘지(眞空妙智)’인지라 다시 특별한 지혜를 얻을 것이 없거니와, 만약 특별하게 얻은 바가 있고 특별히 증득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곧 또한 도리어 옳지 않다. 마치 어떤 사람이 깨닫지 못할 때는 동쪽을 불러서 서쪽이라고 하지만, 혹 깨달았을 때에는 곧 서쪽이 문득 동쪽이라. 특별히 동쪽이 있지 않음과 같다.


이 진공묘지는 태허공(太虛空)과 더불어 그 수명을 같이하나, 다만 이 태허공 가운데 도리어 하나의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장애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비록 한 물건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고는 하나, 모든 물건들도 허공 가운데서 오고감이 방해롭지 않다. 이 진공묘지도 역시 그러하여 죽고, 살고, 범부, 성인, 때, 더러움이 한 티끌이라도 붙이려고 해도 붙일 수 없음이니, 비록 붙이려고 하여도 붙일 수 없음이나, 죽고, 살고, 범부, 성인, 때, 더러움이 그 가운데서 오고감이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믿어 이를 수 있고, 보아 사무칠 수 있다면 비로소 생사의 출입에 크게 자재로움을 얻은 사람이라. 비로소 조주의 방하착과 운문의 수미산과 더불어 조금 서로 응함이 있겠거니와, 만약 믿지 못하며, 놓아 내려버릴 수도 없다면, 도리어 한 더미의 수미산을 짊어지고 가는 곳마다 행각하여 눈 밝은 사람을 만나서 분명하게 들어바치기를 청하노라.

한 번 웃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