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밀에게 답하는 편지, 첫번째
편지를 받아보니, “젊은 나이에 이 도를 믿어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았다가 만년에 알음알이[知解]의 장애되는 바 되어 깨달아듦을 구하는 곳이 있지 아니함일세. 아침저녁으로 도를 체달하는 방편을 알고자 한다”하니, 이미 지극한 정성을 짊어졌음이라 감히 스스로 멀리하지 못할새 탄식함에 의거해 답안을 맺어서 (언설의) 갈등을 약간 하리라.
다만 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문득 도를 가로막는 알음알이니, 다시 달리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 그대에게 장애를 짓겠는가? 결국에 무엇을 불러서 알음알이라 하겠는가? 알음알이는 무엇을 좇아왔는가? 장애를 받는 사람은 다시 누구인가? 단지 이 하나의 글귀에 뒤바뀜이 셋이 있으니, 스스로 알음알이의 장애되는 바가 된다고 말함이 하나요, 스스로 말하기를 깨닫지 못해서 미혹한 사람이라고 달게 여김이 하나요,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림이 하나이니, 다만 이 세 가지 뒤바뀜이 문득 생사의 근본이 됨이라. 곧 모름지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여 뒤바뀐 마음이 끊어짐이라야 바야흐로 미혹 가히 깨뜨릴 것이 없으며, 깨달음 가히 기다릴 것이 없으며, 알음알이 가히 장애됨이 없음을 알 것이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갑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음이라.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와 같은 견해를 짓지 않으리라.
다만 알음알이라고 능히 아는 마음 위에 나아가서 살펴봐라. 도리어 장애하는가, 마는가? 알음알이를 능히 아는 마음 위에 도리어 허다한 것들이 있는가, 없는가? 위로부터 큰 지혜가 있는 선비들이 모두 알음알이로써 벗을 삼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 알음알이 위에 평등한 사랑을 행하였으며, 알음알이 위에 모든 불사(佛事)를 짓되, 마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아서, 마침내 이것으로써 번뇌를 삼지 않았음이니, 다만 그들이 알음알이의 일어난 곳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곳을 알았을진댄 곧 이 알음알이가 문득 해탈의 도량이며, 문득 생사를 벗어나는 곳이라. 이미 해탈의 도량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곳인댄, 앎과 이해함이 즉시에 적멸할 것이며, 앎과 이해함이 이미 적멸할진댄 알음알이라고 능히 아는 것도 가히 적멸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며, 보리. 열반과 진여. 불성도 가히 적멸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다시 무슨 물건이 가히 장애함이 있을 것이며,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깨닮아듦을 구하리요?
석가노자께서 이르시길, “모든 업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남일세. 그러므로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고 설명함이로니, 만약 이러한 분별을 여읜다면 곧 모든 갈래[有趣]를 멸하리라”고 하시며, 어떤 스님이 대주화상에게 묻되 “어느 것이 큰 열반이닛고?”하니, 대주화상께서 말씀하시길, “생사의 업을 짓지 않음이 큰 열반이니라”고 하셨다. 스님이 다시 묻되, “어느 것이 생사의 업이닛고?”하니, 대주화상께서 말씀하시길 “큰 열반을 구함이 생사의 업이니라”고 하시었다. 또 고덕이 이르시되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이라도 생사를 헤아린다면 곧 마구니 길에 떨어짐이요, 한 생각이라도 모든 견해를 일으킨다면 곧 외도에 떨어진다”라고 하시며, 또 정명이 이르시되 “모든 마구니들은 생사를 좋아하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외도들은 모든 견해를 좋아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이에 알음알이로써 벗을 삼고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서 알음알이 위에 평등한 사랑을 행하고 알음알이 위에 온갖 불사를 짓는 본보기이니라. 다만 그들은 삼아승기겁이 공하여 생사. 열반이 적정함을 명백히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이미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진댄, 가히 삿된 스승들의 어지럽게 이야기함을 받아서 귀신굴 속에 이끌려 들어 눈썹을 붙이고 눈을 합하여 망령된 생각을 짓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노라......만약 이러한 거취를 짓는 놈인댄, 비록 잠시나마 그 냄새나는 가죽주머니를 얽어매어 두어 문득 구경을 삼음이나, 마음이 어지럽게 나부낌이 마치 야생마와 같아서 비록 그러나 마음이 잠시 멈출지라도 마치 돌로써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아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생하나니, 위없는 깨달음을 취하여 구경의 안락한 곳에 이르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만약 곧바로 꺾어[俓截 : 지름길]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한 생각을 활연히한 번 쳐부숴 버림을 얻어야만 바야흐로 생사를 마칠 수 있으리니, 비로소 깨달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1. 간절히 가히 마음을 두어서 부서지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만약 마음을 두어서 쳐부수려는 곳을 둔다면 곧 영원히 쳐부숴버릴 기회가 없을 것이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뀐 마음과 헤아려 분별하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 한꺼번에 내리 누르고 다만 내리눌린 곳에 나아가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스님께서 이르시되 “없다[無]”라고 하시니, 이 한 글자는 곧 허다한 나쁜 지견과 나쁜 앎을 꺾는 무기이니라.
2. 유무(有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3. 도리(道理)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4. 의근(意根) 아래를 향하여 사량으로 헤아려 재지 말며, 5.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곳을 향하여 뿌리를 박지 말며, 6. 언어의 길 위를 항하여 살림살이를 짓지 말며, 7. 일 없는 가죽껍질 속을 향하여 드날려 있지 말며, 8. 들어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잡아 해결하려 하지 말며, 9. 문자 가운데를 향하여 인증하려 하지 말고, 다만 하루종일 네 가지 위의 속을 향하여 때때로 잡아이끌며, 때때로 들어 깨닫게 하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르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을 평상시에 여의지 말고 시험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살펴보면 어느 달 아무 날엔 문득 스스로 볼 수 있으리니, 한 고을 천 리의 일이 도무지 서로 방해롭지 않으리라.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속은 살아 있는 조사의 뜻이라, 무슨 물건이 능히 저를 구속하여 잡아매겠는가?”라고 하시니, 만약 날마다의 씀씀이를 여의고 달리 향하여 나아감이 있다면 곧 이는 물결을 여의고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고, 그릇을 여의고서 금을 구하는 것과 같음이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더 멀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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