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 윤창화 대표가 지난 7월 7월 월요포럼에서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 해석은 도교적 관점일 뿐 아니라 화두참구가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돼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분별망상이다”라고 주장한데 이어 성철선사상연구원 원충 스님은 본지(957호 19면)를 통해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는 수행점검의 기준으로 윤 대표는 몽산어록 등 기본적인 자료해석부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윤 대표는 다시 원충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지난주 반론에서 원충 스님은 “『몽산법어』, 『나옹어록』, 『태고어록』의 오매일여 표현은 화두를 참구해서 얻은 견처(見處)를 ‘형이상’으로 표현한 것이다.…이러한 조사스님들의 오매일여 견처관을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된다는 것은 불조의 수행관과 진리관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역대 이래 어떤 부처와 조사가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 불조가 있는가?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분은 오로지 성철스님 한 분 뿐이다. 몽산, 나옹, 태고화상도 단정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특히 간화선의 대성자 대혜선사나 그의 스승 원오극근선사도 『서장』 「향시랑장」에서 “오매일여에 대하여 부질없이 분별/망상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오매일여는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의미이다. 실제적 의미로 이해하면 큰 착각이다.
7월 7일 필자가 월요포럼에서 발표한 논고와 같이, 대혜 스님은 36세 때에 오매일여의 실제적 사실 여부에 대하여 그의 스승 원오선사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원오는 대혜의 질문에 대하여 손을 내저으면서 “그만 두게, 그만두게, 그런 망상은 그만두게. 자네가 말하는 그 허다한 망상이 다 없어지면 저절로 오매일여가 될 것이네”라고 하여 오매일여 자체를 분별망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혜선사 역시 향시랑에게 답한 편지에서 “부처님 말씀도 반연하는 마음으로 들으면 그 법도 분별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하여 역시 오매일여에 대하여 분별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오매일여, 즉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낮에는 물론이지만, 밤에 숙면 속에서도 망각/상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조사선이 아닌 간화선에서의 오매일여이다. 그것도 간화선이 생겼던 송대의 논의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만 이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의 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두 선사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화두를 들어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심이요 망상이라는 것이다.
성철 큰스님의 오매일여는 엄격히 말하면 성철선(性徹禪)에서 수행/깨달음의 척도이지, 간화선의 기준점이나 척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철선(性徹禪)은 간화선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고 본다.
『현사어록』의 내용
『현사어록』의 내용은 “更有一般便說. 昭昭靈靈 靈臺智性, 能見能聞, 向五蘊身田裏, 作主宰, 恁麽爲善知識, 大賺人. 知麽. 我今問汝. 若認昭昭靈靈, 是汝眞實, 爲什麽瞌睡時, 又不成昭昭靈靈. 若瞌睡時不是, 爲什麽有昭昭時. 汝還會麽. 遮箇喚作認賊爲子, 是生死根本, 妄想緣氣. 汝欲識此根由麽. 我向汝道. 汝昭昭靈靈, 只因前塵, 色聲香等法 而有分別, 便道此是, 昭昭靈靈. 若無前塵, 汝此昭昭靈靈, 同於龜毛免角”이다.
이 말은 사람들이 대부분 소소영영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소영영은 한 마디로 육근이 육진(경)을 만나서 이루어지는 지각(知覺)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소영영한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진실(본성)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원충 스님은 이 문장을 “중생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러한 밝고 밝은 깨달음의 본성, 즉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을 깨치지 못한 중생심은 겨우 내 몸 하나 주재하는 것밖에 되지 못하므로 분별의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잠든 상태에서도 그런 본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고 해석했는데, 과연 이 원문이 그런 뜻인가?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현사선사는 소소영영 자체를 ‘밝고 밝은 깨달음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 지각심, 분별의식, 심의식으로 보고 있다. 『선문정로』에는 이 문단 중에서 아주 중요한 ‘爲什麽 有昭昭時. 汝還會麽’를 누락시킨 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958호 [2008-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