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내리막길에 보았네
입력: 2008년 07월 18일 18:02:40
가마솥 무더위를 견디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나무 그늘이 좋은 집 앞 개울가에 나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책을 몇 페이지씩 읽는 일이다. 이보다 좋은 피서법을 나는 찾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나는 현대 영성의 대가로 알려진 헨리 뉴엔 신부가 말년에 쓴 자서전을 매일 조금씩 읽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하버드대학 출신의 그가 쓴 20여권이 넘는 저서는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는 그런 저술활동과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많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지체아 보호시설의 직원으로 취업을 했다. 그가 거기서 하는 일은 정신지체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는 일이었다.
가끔씩 매스컴에서 기자들이 찾아와 헨리 뉴엔에게 물었다.
“대학자가 왜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습니까?”
그 때 헨리 뉴엔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동안 ‘성공’과 ‘인기’라는 이름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달려 왔지요. 그런데 한 장애인을 만나 내리막길을 통해 하
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나’만 보일 뿐이었죠.”
- 오르막길선 오로지 ‘나’ 만 보여 -
영성의 대가다운 고백이 아닙니까. 오르막길에서는 ‘나’만 보이더라는 것. 내리막길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더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는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그렇게 ‘합일’에 이르고자 몸부림쳤던 존재의 궁극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보통 종교인들은 성공과 인기, 축복과 건강만을 신앙을 통해 받을 보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뉴엔 신부는 자기 생의 말년에 그것이 종교인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오르막길을 향해서만 내달릴 때는 ‘나’만 보인다. 오르막길에서는 타자의 얼굴이 보일 리가 없다. 오르막길을 향해 내달리면서도 습관처럼 ‘사랑’을 되뇔 수는 있다. 그러나 오르막길에서의 사랑은 ‘자기애’(自己愛)일 뿐이다. 그걸 ‘나르시시즘’이라 하던가.
우리가 잘 아는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오직 ‘자기애’에 빠져 다른 이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병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나르시스는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다. 그는 언제나 ‘홀로주체’로 존재할 뿐이다(김상봉). 홀로주체적 정신은 타자를 위해 결코 자기를 상실하려 하지 않는다. ‘너’가 있어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삶의 정황 속에서 살아온 타자를 도우려고 한다면, 먼저 타자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나르시스처럼 자기에 도취된 사람은 결코 타자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의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르시스처럼 ‘긍지’(superbia)에 차 있는 사람은 때로 자기의 것을 내어 도움을 베풀어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긍지란 내가 타자보다 ‘위에 있다’는 의식이기 때문에, 그런 긍지에 차서 타자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자기애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 ‘큰바보’ 정신은 너도 나도 살려 -
앞서 말한, 헨리 뉴엔 신부는 오르막길을 걸어온 자신의 사랑이 나르시스의 그것처럼 ‘자기애’일 뿐임을 깨닫고 내리막길로 돌아선 것이다. 오르막길을 향해 달릴 때 ‘나’만 보이더라는 고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는 그처럼 ‘홀로주체’로 살아온 자기를 스스로 상실함으로써 타자를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동심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나르시스적인 ‘홀로주체’의 정신만 도드라지는 듯 보인다. ‘홀로주체’의 정신은 결국 나도 상실하고 너도 상실하는 정신인데 말이다. 하지만 예수나 붓다 같은 이들이 보여준 큰 바보의 정신은 너뿐만 아니라 나도 살리는 정신이다. 그런 정신의 샘에서 피어나는 향기는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 향기에 매혹된 이들의 자비와 연대와 헌신이, 오늘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곧추세우는 기둥이 아닐까.
<고진하|시인·숭실대 겸임교수>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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