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마음자리에 도달했다(수행법 원리포함)
등록자명: 곽홍남 등록일자: 2007.07.31 조회수: 110
3부
감히 증명되지 않은 내용을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나 극히 합리적인 사고로 쓸까한다.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같은 종교 내에서도 많은 이견으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명 선의의 피해자가 있고 설사 종교가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근원이 될 수 있는 종교의 등장부터 추척할까 한다.
인용은 다분히 증명까지는 안되도 다수설과 선문의 고인들 말씀을 끌어다 쓸까 한다.
인간의 구석기 시대가 대략 250만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인간이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한지는
대략 40만년에서 35만년을 보고 있고 그 시기를 신석기시대로 학계는 보고 있고 농경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청동기 초기로 보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런 학계적인
말은 필요없다. 인간이 그동안 수렵 생활하면서 들뜬 마음이 정착 생활로 전환되면서 그전에
단순히 두려움으로부터 도피로 일관하던것이 정착하면서 두려움과 정착으로 인한 여러 인간관계가
복합적으로 발생되기 시작했다. 분명 그 시기에도 이런 문제점들을 돌파하고자 노력들을 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고대 법도 존재할 수 있었고 문명이 형성되었으니 말이다.
(달마대사가 들뜬 마음이 없이 철벽 같아야 도에 들수 있다듯이) 그 당시 고민한 이들에 의해
각성 없이는 토템미즘과 남근숭배, 모계중심의 사회가 성립되었고 각성의 깊이에 따라 샤머니즘
과 유대종교나 힌두교적인 성격의 종교가 성립 되었으리라 본다. 인간이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전도된 사고로 인해 자신들보다 강력한 존재가 필요했고 각성은 그 필요성에 의해 활용되어진바
샤머니즘같이 자연 모두에 경외의 대상인 신적인 존재로 부각되었고 또는 불교의 실상법을 일부
경험한이에 의해 유대종교나 힌두종교가 펼처진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그 종교들의 신을 묘사
하는 것이라든지 전설들이 거의 대동소이하며 바로 앞에서 전달된 이야기도 금방 와전되는 우리
들의 특성상 오랜 시간 변천과 와전으로 본래의 취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으리라 본다.
예로 유대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자음밖에 존재하지않은 상태에서 학자들이
추론하여 모음을 붙여 "아도나이"라는 말을 만들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는데 그뜻
이 "스스로 있는자"라고 하니 불교의 불성 실유사상과 별 차이가 없고 힌두교의 3신 사상도
불교 법신사상과 부합되는 면이 많은고로 그들의 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
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많은 시간속에서 인간의 헛점을 파고든 결과물이라 본다.
그럼 불교는 어떤 것이냐? 석가모니 당시에도 세론이라고 흔히 무기다 라고 붙혀진 이른바
우주는 끝이 있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이런 부류의 당사자 공부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에 세존
께서 입을 다무셨는데 이젠 과학이 발전하니 오히려 불법의 증거자료가 되면 되었지 세론으로
치부되는 험한 꼴은 면한듯 싶다.
현재 우주의 크기와 형성에 대해 얼마전까진 "빅뱅론(우주 폭발설)"에서 (이유가 별자리 사이의
간격이 점차 멀어지는데 근거를 찾았으나) 블랙홀이라는 왜성에서 빛의 직진성이 허물어지고
빛도 물질로써 휠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어느 별자리에서 일관적인 빛의 휨을 발견하고
"우주 팽창설(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은하군은 풍선의 겉부분에 위치 함.)이 다수설 쪽으로
흘러가고 어느 천문학자는 마치 우리 과학자가 접근하면 신기루처럼 멀어지는것이 인식이
목적물에 도달하면 새로이 형성되는것 같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불교의 연기설에 입각하여
인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대상물이 존재하는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심지어 작은 물질로써는 물리학에서 원자 분자 쿼크 단계까지 가고 심지어 물질과 비물질로
분류하여 우주의 암흑믈질이라든지 영혼에 대해서도 연구를 진행하는바 인식이 과학의 발달로
장비가 허락하는한 미치는 범위에는 대상물들이 존재해 왔다. 언젠가는 인식의 변환이 이루어져
모든것이 깔끔이 정리되는 날이 올것이라 본다.
그러니까 있다 없다 소견을 짓지말라는 것이다. 모든 망상이 생사의 화근임을 믿으라는
것이지 여기에 생각을 붙여 재미를 갖지마라는 말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허깨비 같은 인식을
쫓아서 무엇하려는가? 그런것은 일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맡기자.
그럼 불교는 어떤 이유로 생성 됐고 어떤 수행이 어떤 식으로 어떤 역활을 하는지 알아보자.
2550년경 한 청년의 만족 못하는 욕망과 궁금증이 만법의 진리를 발견했으니 불교를 말한다.
생로병사로 인한 영원한 행복감을 박탈당한 것에 대한 탐구가 수행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물이
무상정등정각이니 타 종교에서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진리이며 구체적인 수행법 조차 없으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 가르치고 기도방법을 가르쳤으나 가르침을 받는자들이
형상과 문자에 매여 현재 위험한 괴물 모습으로 변했다.)
다행히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 의해 모든 인간이 석가모니께서
알았던 모든것을 전수 하셨으니 그것들이 후세 깨달은 위인들과 더불어 경전과 구체적인 수행법
으로 남아 있다.
석존께서 첨 접한 수행이 4선 팔정으로 팔정을 팔해탈 혹은 팔배사라고 하는데 이 수행을
현재 단순히 소승법이라고 외면하는데 당시 석존께서는 4선 팔정으로 12연기를 깨달으셨으나
근본 무명을 타파하지 못하시자 구경이 아니라고 하시고 어렸을때 경험했던 편안한 수행을
떠올리시고 다 놔버리는 관수행을 하시고 구경의 깨달음을 증득하셨다.
깨달으신후 첨 하신 말씀이 바로 모든 중생이 망상만 여윈다면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이
구족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그 후 수행법으로 안반수의경,입출식경,대념처경으로 크게 사마타(지)
와 비파사나(관) 수행법을 말씀하셨다.
어찌 부처님께서 소승법으로 깨달으시고 소승법을 쓰시고 소승법을 가르쳤겠는가? 단지
후인들이 대오 견성치 못하여 수행법의 원리를 몰라 소승법 대승법을 구분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말해 4선 팔정은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선문으로 설명하자면,
선문에선 대원경지의 큰 기틀이 있고 중생 하나 하나마다 옛 거울이라는 무명이 있다.
불법의 연기 실상법은 대원경지의 큰 기틀에서 발현되어지는 현상법과 중생의 무명에서 발현되는
번뇌라는것이 서로 얽히고 설켜 이 사바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 실상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
라는 진리이다.
이 큰 무명과 작은 무명은 항상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하는데 이 무명의 실체를 불성이라고도
하는데 큰 무명은 현상세계를 이룩하고 작은 무명은 인식에 따라 온갖 번뇌를 만들어 낸다.
헌데 이 무명은 거울과 같아 스스로의 모습이 없지만 전도된 망념에 의해 온갖 법이 존재하는것
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사생육도를 의보(세계)와 정보(몸)로서 윤회의 과정을 성립한다.
큰 무명은 전변하여 대원경지를 작은 무명은 전변하여 평등성지와 묘관찰지,성소작지를 완성한다.
이 근본무명을 타파하지 않고는 구경의 진리를 알수가 없는데 이 근본무명의 제거의 결과물을
무아라고 하는데, ------------ 나는 법무아,인무아를(제법무아) 통털어 그냥 무아라고 쓰겠다.
무아에 근접 할수록 무아에 반대되는 기식이 멸한다. 즉 호흡이라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번뇌인 것이다. 이 호흡이라는 것이 나라는 몸이 있는 이상 완전히 소멸할 수가 없는데,
가장 가깝게 소멸 시킨것을 멸진정이라고 하는데 그 멸진정도 인위적인 수행이라서 인위적인 수행
으로는 마치 하늘로 쏜 화살과 같아 그 수행력이 다하면 다시 떨어지는거와 같아서
아라한들의 멸진정도 석존의 말씀대로 오랜 세월 후에 다시 번뇌의 물듦을 받고 선문에서도
풀을 바위로 누른것과 같다고 했다. 간화선으로 여러번의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즉 간화선은 중생의 근본무명에서 출발한 수행이고 묵조선은 근본무명을 무시하고 바로 망상을
쉬어 대원경지로 바로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종국에는 대원경지를 원불교는 일원상에 너무 집착하는데 그것마저도 버려야지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집착하는지, 불법은 집착 할것 같은면 죄다 사이비에 떨어진다. 앙산스님은 일원상
안에 날일자를 쓰고 바로 지워 버렸다. 이것이 바로 경절문이요, 조사선이다.)
헌데 무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문에서 대사일번 즉 타성일편되어 은산철벽을 뚫고 크게 죽었
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했는데 선문의 거장들 말에 의하면 은산철벽을 뚫고 나니 그 은산철벽이
바로 자신이였슴을 고백하고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생각의 끊어짐으로 인해 망상 분별심의 정체를
알듯이 생사의 연속성을 크게 죽었다 살아남으로 인해 생사가 본래 없슴을 요달하기 위한 것이다.
생사가 본래 없음을 요달하면 생사의 원인도 알수 있는데 선문에선 이걸 향상의 일구라고 한다.
간화선은 근본무명에서 생각을 오로지 하여 화두삼매(타성일편)로 은산철벽을 형성하고 의정이
극에 이르러 자신의 기식을 인위적으로 단절함과 동시에 견성하게되는데 이 의정의 수행법이
사마타요 화두삼매가 비파사나에 해당한다. 헌데 문제점이 사마타나 묵조선의 경우는 기식이
급격하게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소멸되어서 시간이 소요되나 부작용 (깨달았다고 온갖
망상을 늘어 놓는 경우)이 간화선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착각한 견성보다는 그 해약이 작다.
작은 깨침을 왜 해악이라고 하는가 하면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고 느끼면 앞으로 더나아갈 분이
되지만 스스로 깨첬다고 느끼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려 들어 남도
작은 틀에 가두는 역활을 하게된다. 그 이유가 의문점인 화두타파에 있겠다고 볼수 있겠다.
물론 그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든 화두 타파는 아니지만 잠깐동안의 무아 경험으로 은산철벽을
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은산철벽을 구경의 모습으로 전도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인게 그 증거이다.
그래서 선문에서 황벽스님의 제자이자 임제선사의 사형인 목주선사는 현성공안을 참구하라고
하기도하고 다른 선사들은 회광반조하라고 하기도 하고 석상경제스님은 쉬라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나 역시 간화선으로 큰 깨달음을 4번 정도 작은 깨달음을 여러번 겪었는데 그 중간
중간 느낀것이 의정이라는 것이 성성 그자체로 깨어 있슴과 같고 그 힘으로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면서도 텔레비를 보면서도 응용할 수 있었는데, 간화선이 무아로 가는 지름길임이
확실하나 유위법이기 때문에 바로 그 힘을 소모한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길 완전히 기식을
끊어야 한다고 한 그곳까지 의정을 끌고가서 대사일번하면 괜찮으나 마조선사의 84인
선지식들도 대부분 그러질 못해 황벽선사가 귀종선사나 몇분을 제외하고는 똥이나 빌빌
싼다고 혹평을 했다.
또한 원오심요에 이르기를 향림스님은 40년만에야 한덩어리를 이루었고 남전스님은 18번만에야
살 궁리를 할 줄 알았다, 하였으니 단순히 간화선 하나로는 대오견성은 무리라는 것을 증험한다.
그럼 대오견성은 무엇이냐 단순히 무아를 체험하고 공안을 뚫고 거기서 끝나는것이 아니다,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보림과 성태를 기른다는 돈오점수의 외침을 받을 것이다. 대오견성에
대해 글로 나타난 것이 부지기지만 현상세계를 접목해서 설명하겠다. 대오견성은 도에 계합
되어야지 나타나는 경지로 삼라만상이 내가 가정에서 쓰는 잡화물처럼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안쓰는 경계로써 제방에서 견성했다고 쓰는 할이나 비로자나불 운운은
대오견성의 경계와는 십만 팔천리인 것이다. 이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이 아는
평상심과는 그 의미조차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사마타는 자신의 기식을 완전히 제거하여 정을 이루고 그 정으로 지혜를
밝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촛불의 정이 없으면 빛의 지혜는 나오지 않는것이다.
그럼 무식하게(무식하게 공부하듯이) 사마타를 할것이냐? 아니다 간화선의 의정 화두삼매로 기식을
끊되 그냥 간화선을 하면 깨달을 기약이 없다. 그 처방이 바로 인왕선이다. 인왕선이란 두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불끈쥐고 무릎위에 얹어놓고 척추를 장대처럼 바로 세우고 화두를 뚫어지게
관하면서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면 상기도 막을 수 있고 앞 뒤 꽉 막힌 의정을 최대한
일으킬 수 있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과거 향산스님이나 대부분의 스님과 나도 그렇게 뚫었다. 아마 아는 사람은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니 인왕선이라는 이름이 존재 했을것이다. 의정이 돈발하면 그 같은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몸이 그렇게 가면 의식은 꼭두각시라 따라가게 되어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다 인연의 결과물이니 인연을 제대로 짓지 않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그렇게 초견성후 스스로 점검을 해야하는데 알음알이 없이 공안을 풀지 못하면 계속 화두를
들데 첨처럼 인왕선을 안해도 된다. 일단 의정의 힘으로 기식이 뚫렸기 때문에 호흡이 잠잠해
질것이다. 간화선을 하던 자각종책선사의 자선의를 참고하고 그 내용이 기신론의 수행법과
같고 묵조선과도 같은데 묵묵히 쉬고 쉬다보면 황벽선사나 여러 고승대덕들의 말씀대로
무심히 도에 계합해지는 때를 만나게 될것이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그야말로 당사자가
활용하기에 따라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편이지 목적이 아니다. 종경록에도 마음을
내려 놓은 그게 도에 들어가는 제일의 첩경이라고 했으니 의심치 않아도 되리라 본다.
이것이 수행의 요체이다. 대오 견성하고보면 그야말로 수행이라는 것이 부질없음을
스스로 증험 할것이다.
참! 염불선에 대해 언급을 않했는데, 염불선은 간화선처럼 염불하는 이놈이 무엇인가?
하지 않을바에는 안하는것이 좋다. ----------------------------- 이유를 말하자면
염불선은 대신심을 갖춘자만이 들어갈수 있는 문이지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세간에 염불선이 아무나 들어가고 쉽다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거의 100% 마구니의
권속이 되기 쉽상이다. 무엇이 망상인지도 모르는 범부들이 무명에서 생기는 현상들에
현혹되서 부처를 만났네, 신을 만났네, 스스로부처네, 이런류의 헛소리를 늘어 놓거나
완전 미친사람처럼 되는데 석가모니께서도 이례적으로 그 사람에게만 염불을 가르치셨지
아무에게나 아무때에나 염불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염불이 수승했다면 아마 타종교처럼
되는대로 놔뒀을것이다. 그것이 방편문이다. 빔비사라왕의 부인처럼 모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경우 그녀에게 힘이 되어 드리기위해 염불을 가르치신것이고 그 왕비의 신심은
가히 가르침대로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는 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것이다.
현재 여러분들의 신심은 어떤가? 가슴속에 의혹과 불신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불법은 가히 얻을것이 없음을 얻는것이다. 그런데도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그 마음으로
염불을 하는것이 가능하겠는가? 불법은 무엇인가 하려고만 하면 바로 어긋나는데
과연 염불 같은것을 할 수 있겠는가?
2007.08.25 인터넷으로 가야산법맥을 살피던중 성철스님께서 평소에 능엄주나 아비라주
(본인은 않읽어봤슴.)가 관세음보살 부르는것보다 수승하다고 한것을 학자들과 논쟁하고
일반인들이 뭐 신통방통한게 있나부다 착각하는것을보고 저의 소견을 적습니다.
운동을 첨 시작하면 이게 습관이 안되서 힘들고 정신통일도 잘되지요? 즉 잡 생각을 못한다
이말입니다.
아마 그 주문들이 혀가 꼬일정도로 단어배열이 간단하면서도 정신안차리면 못읽을 정도
되있을겁니다. 그리고 무슨뜻인지도 모르고요, 그렇지않나요? 일반적으로 염불은 다
상상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진언들은 그런게 없지요.
그런거 보면 참 석가모니라는 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그 뜻을 간파한 성철스님도 대오견성
하지않고서는 그 뜻을 알지못하지요. 제가 말하는거 무슨뜻인지 알겠지요?
무엇을 하던지 생각을 일으키면 그건 망념이요. 수행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그게 안되니
환법으로 환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치신겁니다.
그런 수행이 완성이 되면 일없는 사람이 되어 겉으로 보기에 도무지 바보같고 게으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예전에 황벽선사회상에서 황벽선사가 법당을 지나자니 귓퉁이에서 자고 있는 임제선사를 보고
주장자로 법전을 툭툭치니 그소리에 임제선사가 눈을 지그시 뜨고 보더니 다시 잠을 자는 겁니다.
그러니 황벽선사가 그놈 공부 잘하는구나, 하시며 이번에는 선방으로 가니 정상좌가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황벽선사가 주장자로 바닥을 툭툭치시며 소리를 내자 정상좌가 지그시 고개를 들어
황벽선사를 바라보자, 황벽선사가 이놈 여기서 무슨 망상을 부리는거냐 하시자 정상좌가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좌선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바는 이런 대도인들의
안심입명처를 활용함에 있어 자는것도 공부이거늘 현재 누가 제가 잠을 즐긴다면 공부를 하는
것인지 단지 잠을 즐기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분이 있냐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출가하고 싶었지만 다들 앉는 연습이요, 습정만을 요구하여 나는 몇일 안잤네,
나는 몇년을 장좌불와했네,하며 전혀 도와는 다른 말들만이 있을뿐 진정한 공부 이야기가 없었는데
지금도 그러합니까?
2007.08.26 불교가 과학적으로 미흡하다? 기사를 읽고
진리라는것은 보편 타당한것으로 사전적의미로 아무에게도 어느곳에도 두루 적용되어지는
사실을 말한다.
현대에 있어 진리는 과학적인 바탕이 없거나 절대 다수의 암묵적인 승인이 없이는 진리라는
감투를 쓸수 없다.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전문적으로 기독사상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진 강국들과 그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아는 범주내에서 거론해 보겠다.
1. 기독사상의 하나님같은 절대자는 진리인가?
2. 성서는 진리인가?
3. 역사적인 증거가 미약한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진리인가?
4. 기독사상에서 주장하는 천국의 개념과 영혼의 개념은 진리인가?
보통 이정도의 범주만으로도 논란의 여지는 무궁하게 나올수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논쟁이
없다가 최근에서야 예수 생애와 사후의 일들로 세간이 한때 신선한 방향을 일으컸었다.
그러나 이내 기독교을 신봉하는 국가나 단체에 의해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다.
즉 기독교를 과학적인 진리라는 측면에서 다루기에는 그 영향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어려서부터 예수영화는 찾아서 볼정도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카토릭의 아시시 프란치스코라는 수도사를 종교 차원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이다.
결론은 진리에도 과학적인 진리가 있고 결코 넘을수 없는 종교라는 진리가 있다.
물론 종교에도 사람에게 이익되는 종교와 사람에게 해를 주는 사이비 종교가 분명 있다.
과학적인 탐구가 이제 막 시작하는 싯점에 인간이 알아낸것은 극히 아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의 맹신자처럼 모든것에 매스를 들이댐은 아직 시기
상조인것 같다.
종교의 진리는 과학이 추구하는것 이상으로 같은 눈으로 보아도 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슴을 과학을 추구하는 학자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직접 길을 걸어보고 답을 찾아봄이
마땅하다고 본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라는 거장도 어떤 깨침을 얻고 서구적 사고방식으론 이해하지 못하는
말년을 보내다 결국 기차역 대합실에서 죽었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
07.09.14 학력 위조를 보고
나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이는 이제 고1이고 둘째는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그냥 집에서 논다.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여 초등학교 내내 힘들어 하여 아예 학교를 안보냈다.
안보내니까 지세상 만난것처럼 하루 종일 논다. 그래도 난 별말 안한다.
아이 엄마도 별 애기를 안한다.
큰아이는 그런대로 잘 버티면서 공부를 곧잘한다. 헌데 알고보면 지엄마의 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공부 꼴찌해도 좋으니 그냥 아이 스스로의 능력을 확인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근데 엄마는 일반 사람들처럼 성적에 목숨을 건다.
싹수있다며 큰놈만 다구친다. 큰놈이 크니 이젠 엄마한테 대들기도 한다.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하하 많이 컸다.
나는 애들을 방임하면서 이것 하나만 이야기 한다.
나는 너희가 훌륭한 사람되고 잘사는 사람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절경은 도랑의 빗줄기 자국에 지나지 않고, 산해진미는 고기한점, 구중궁궐은 몸둥이
누운 한평에 지나지 않고 명성은 산의 메아리와 같으니 그저 남의 고통을
알고 가여워 여기는 맘과 좋은 책 읽을줄만 아는 정도의 공부만 하기 바란다.
그래야 너가 커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으니 하기 싫거든 안해도 좋다고 한다.
그럼 애들 엄마는 그렇게 키울라면 왜 낳냐고 한다. 어떨땐 애들도 엄마 애기를 듣고
따라서 이야기 한다. 그럼 난 이렇게 애기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세상에 나가면
착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한다 헌데 나오면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리곤
열심히 좋은말 동원해서 시불이면 큰 애는 반론을 잘 못 들이대는데, 작은 애는
흔히 요새 아이들 쓰는말로 "즐" 이나 "그래서요?" "책에 있는말 말고요" 하면서
입다물라고 웃으면서 씨부린다. 난 그때 하하 거리면서 웃는다. 우리집 식구들은
다 도사들이여 하면서 그냥 넘어간다.
난 아이들에게 너희들 날 따라서 중되지 않을래? 맨날 꼬신다. 애들 엄마는
첨에는 눈에 쌍심지 컸지만 이젠 지첬는지 오냐 다들 들어가라며 체념반이다.
어머니도 애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한다. 헌데 체험하고서는 달라젔다, 많이 늙으시니
젊었을때의 욕심이 사그라지신 모양이다. 근데도 여전히 나를 주위에 붙잡아 두고
싶은 모양이시다.
이혼한지도 7년이 넘었다, 출가하려고 때를 기다리는데 그냥 한집에 산다.
핀란드 사람들처럼 법적 혼인관계 없이 그냥 한집에 산다. 너의 인생이니
너가 후회없는 삶을 살으라고 말하지만 은근히 걱정한다.
아이들은 출가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세상에 살고 싶은데로 살아라, 그리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죽고 싶거든
언제든지 출가해라, 너희가 힘들다고 그냥 죽으면 그보다 더 힘든 삶이
기다릴지도 또 반복될지도 모르니 그럴바에야 중이되어 아빠처럼 깨달아 보라고
한다. 못깨달아도 좋다고 한다. 너가 다만 힘들면 중이 되라고 한다. 이말을
꼭 잊지말라고 한다. 너가 땡중이 되어도 좋다, 일단 중은 되어라 라고 한다.
아이들도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곧잘 아는 소리를 한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 본인만이 그때를 느낀다. 주변의 인물들은 그냥 한없이
기다려 주기만 하면된다.
불자들이여 학력위조를 묻지 말자. 넉넉한 사람은 기다릴줄을 안다.
불자들이여 승가가 청정하지 못하다고 비난하지 말자 내 자식들일수도 있다.
한사람만이라도 청정한 사람이 있다면 승가는 영원하리라...
--http://www.buddhism.or.kr/_seon/ascetic/board.asp-간화선수행기에서-
출처 : 禪 이야기
글쓴이 : 염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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