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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삼십송 강설]17. 식전변

slowdream 2008. 12. 11. 03:48

[유식삼십송 강설]17. 식전변
자아와 세계는 식전변에서 발생
인식은 꿈같고 물거품 같은 것
기사등록일 [2008년 12월 08일 14:04 월요일]
 

이런 마음현상들이 모두 의식의 전변이다. 분별과 분별되어진 것들이 이것과 저것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일체가 모두 오직 의식일 뿐이다.(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것은 제17송이다. 제6식의 성격을 다룬 제15송과 제16송은 11번째 강설에서 이미 논의하였기에 여기서는 제17송을 거론하고자 한다. 제17송은 지금까지 마음 자체와 마음현상을 열거하고 설명한 것을 총체적으로 다시 정리한다. 그 핵심에는 바로 ‘식전변’의 사상이 놓여있다. 식전변(識轉變, Vijnana-Parinama)의 사상은 세친의 주요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식전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할 수가 있다.

 

첫째는 제1송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아(我)와 세계(法)가 식전변‘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유부학파는 자아(我)와 세계(法)가 이곳과 저기에 외적인 상태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중관학파에서는 일체는 인연에 의한 화합이기에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유식에서는 자아와 세계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마음의 전변에 의한 결과라고 본다.

 

둘째는 같은 의미이지만, 인식의 상황에서 인식되는 대상이나 인식하는 주체가 모두 식전변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분별과 분별되어지는 것, 이것과 저것이 모두 식전변의 결과임을 설명한다. 유부에서는 외적인 존재가 실재하기 때문에 그 대상과 의식의 접촉에 의해서 인식이 발생된다고 본다. 중관학파에서는 인식하는 주체, 인식대상, 인식의 행위가 3가지가 모두 공하여 실재로 인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관계로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식은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하지만 유식학파는 실재(有)도 허공(無)도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은 존재해야한다고 말한다. 곧 ‘실재’도 ‘허공’도, 모두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발생된 결과로서 영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식되는 대상과 인식하는 마음, 이들은 마음의 전변이다. 결국은 마음이 마음을 본다. 물론 전자의 마음은 인식하는 주체적인 마음이고 후자는 인식되는 마음이다. 이들 자체가 바로 전변이고, 또한 전변의 결과로서 현현된 바이다.

 

셋째는 식전변은 심층의 아뢰야식의 현행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의 어떤 장소에 과거의 경험내용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고 본다. 비유하자면, 보관된 장소에서 물건을 찾아서 꺼내면 비로소 현존하게 된다. 보관된 창고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모를 때는 그곳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지만, 현존하는 순간에 이름이 생겨나고, 인식의 주객이 생겨난다. 이런 현상이 바로 식전변이다. 식전변은 심층의 경험정보가 표층의 의식수준으로 나타날 때, 그래서 인식의 주객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마음의 현상을 말한다.

 

이때 유식(唯識, Vijnapti-matra)이란 외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자아와 세계나, 인식의 주객이나, 모두 실재하지 않고 오직 의식, 곧 영상, 표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영상 혹은 표상이 현현되는 순간에 인식이 주객으로 분열되고, 자아와 세계가 나누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식전변이라고 한다. 인식되는 주관을 자아라고 동일시하고, 인식되는 대상을 세계라고 투사함으로써,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임을 통찰하지 못한 채, 그것을 실재라고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 유식관은 먼저 인식의 대상으로서 영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고,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인 양 마음에 나타남은 오직 유식의 도리임을 자각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통찰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유식관은 마음에 나타나는 표상, 영상을 관찰하는 ‘영상관법’이 된다. 영상이 마음에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인식의 주객이 분열되어 나타난 시점이고, 영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보는 것은 바로 자아와 세계, 인식하는 주인과 그 대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순간이 된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77호 [2008년 12월 08일 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