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중아함경

21.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

slowdream 2009. 6. 8. 09:22

21.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


부처님이 박게수의 도성인 우다카에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니은 저녁 무렵 아난다와 함께 아치라바티 강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친 부처님은 부채질을 하고 있던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야, 데바닷다는 방일하였기 때문에 지극한 고난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그는 지옥에 떨어져 1겁이 지나도록 구제 받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내가 누구에게 이토록 무서운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야. 만약 데바닷다에게 희고 깨끗한 구석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뒷간에 빠졌는데 다른 사람이 자비한 마음으로 그를 건져주려고 왔다. 그런데 뒷간에 빠진 사람은 온몸 어느 곳도 똥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면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데바닷다는 지옥에 떨어져 1겁이 지나도록 구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난다야. 사람들은 여래가 어떻게 데바닷다가 지옥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쉬운 일이다. 여기 한 알의 곡식 종자가 있다고 하자. 그 종자는 깨어지지 않고 썩지 않고 상자 속에 있다가 봄이 되면 파종이 된다.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리고 싹이 트면 그 종자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때를 맞추어 씨를 뿌리지 않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때를 맞추어 선법을 닦고 번뇌를 제거하고 더욱 북돋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번뇌가 깊어져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면 나쁜 곳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비유하면 새벽이 되어 둥근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선법을 행하는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고 해탈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해질녘에 해가 지는 것을 보면 어둠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한결같이 나쁜 짓을 멈추지 않으면 그것이 미래생명의 근본이 되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할 때 나쁜 곳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중아함 27권 113경 <아로파경(阿奴波經)>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아난다의 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좋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삼역죄(三逆罪)를 지었다.

즉 그는 5백 명의 추종자를 모아 별도의 승가를 세우고 부처님에게 네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비구는 늘 보시 받은 좋은 옷을 입지 말고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며, 공양에 초대받지 말고 걸식으로 생활해야 하며, 지붕이 없는 나무 밑에서 살아야 하며, 썩은 오줌으로 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처님에게 승단의 지도권을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교단의 화합이 깨지고 분열이 일어났다.(破和合僧)

이에 대해 부처님은 불허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추종자들은 다시 부처님에게로 돌아갔다. 이에 데바닷다는 교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시해해야 되겠다는 반역의 생각을 품고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코끼리가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자 이번에는 스스로 바위를 굴려 부처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했다.(出佛身血)

이런 무도한 일에 대해 연화색 비구니는 데바닷다를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데바닷다는 분노해서 그녀를 주먹을 때려 숨지게 했다.(殺阿羅漢)

말하자면 데바닷다는 예수의 유다였고 공자의 도척이었던 셈이다.
이러 일을 저지른 그를 교단이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경전은 데바닷다 얘기만 나오면 그가 얼마나 몹쓸 사람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경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부처님의 입을 빌려 저주에 가까운 비난하는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보통의 경우 부처님은 그의 배신행위를 한탄하지만 구제 받지 못할 몹쓸 인간으로 표현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이 보이는 것은 그가 도무지 손쓸 수 없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짐작케 한다.

한편 대승경전인 <법화경> 데바닷다품은 데바닷다와 같은 악인도 마침내 성불하여 천왕여래라는 호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행해진다. 데바닷다와 같은 사람을 일천제(一闡提)라고 하는데 이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악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어떤 악인도 구원이 돼야 할 교리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한 데바닷다마저 구원이 된다. 이 점은 대승불교의 위대성이다.

그건 그렇고,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은 데바닷다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수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도 그런 악연은 피해가지 못했음을 상기하면 조금 위로가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