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기초마련에 결정적 역할 유명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촉발 “변함없는 자성 지닌 독립실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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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는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연구소는 후에 이름을 닐스보어 연구소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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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정보이론은 지난 세기에 물리과학 분야에서 형성된 가장 중요한 세 이론일 것이다. 상대성이론과 고전정보이론이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과 샤논에 의해 완성된 데 비해, 양자역학은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버그, 디락, 프랑크, 아인슈타인, 컴프턴, 드브로이 등 여러 사람에 의해 그 구조와 개념이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보어(Niels Bohr)는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여러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닐스 보어는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보어의 탁월한 업적을 기려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연구소는 그가 죽은 후 그 이름을 ‘닐스보어연구소’로 개명하였다. 원자번호가 107인 원자는 그를 기려 보어리엄(Bohrium)이라 불리우며, 그가 원소의 성질을 예견한 원자번호 72의 해프니엄(Hafnium)이라는 원소가 있는데 Hafnia는 라틴어로 코펜하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보어의 초상화가 담긴 화폐가 1997년부터 유통되고 있다.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보어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1885년에 태어났고 77세의 나이로 1962년에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코펜하겐대학의 생리학 교수였고, 그의 동생은 수학자이면서 덴마크 국가대표 풋볼 선수였으며 닐스보어도 풋볼을 굉장히 좋아해 두 형제는 같은 클럽에서 경기를 했다고 한다.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두 자녀는 어려서 죽었으나 나머지 넷은 훌륭하게 자랐으며, 그 중 아게 닐스 보어(Aage Niels Bohr)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7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며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철학자 회프딩을 통해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을 읽었으며, 양자역학의 기초와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에 전념했던 보어의 철학과 과학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903년에 입학한 코펜하겐대학에서 처음에는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1905년에 덴마크과학문학학술원이 주최하는 대회에서 표면장력의 성질에 관한 일련의 실험으로 입상하면서 철학을 그만 두고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11년에 크리스티안센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박사후 연구원으로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저명한 물리학자 톰슨과 연구하려 하였으나 미숙한 영어와 톰슨의 무관심 등이 겹치면서 러더포드와 연구하기 위해 맨체스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13년에 러더포드의 이론을 근간으로 원자구조에 관한 모형을 제안했으며, 이는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에 관한 실험적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보어의 원자모형에는 전자 궤도와 전자 에너지 준위의 양자화, 빛 에너지의 양자화, 전자와 빛의 상호작용에 의한 에너지 흡수와 방출 등의 가설이 포함돼 있다. 이는 빛의 복사 이론을 원자모형과 연결시킨 것으로서 고전양자론(Old Quantum Theory)이라고 불리며 나중에 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보어는 1916년에 코펜하겐대학 교수가 되었고 1921년에 이론물리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1922년에 원자구조와 원자에서 방출되는 에너지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보어가 설립한 코펜하겐의 이론물리연구소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이론물리학의 세계적 중심지였으며,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하여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대부분은 이곳을 거치면서 보어와 공동 연구를 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양자역학은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프랑크의 가설(1900)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의 광량자설(1905), 보어의 원자모형(1913), 드브로이의 물질파 가설(1924), 파울리의 배타원리(1925),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 세 사람이 발전시킨 행렬역학(1926), 슈뢰딩거의 파동역학(1926), 디락의 상대론적 양자역학(1930) 등 아주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양자역학은 지금까지 인류가 가졌던 자연에 대한 이론 중 가장 정확하게 자연을 기술하는 이론이며, 현대물리학의 거의 모든 부분과 관련되는 기본 이론이기도 하다. 정확성과 보편성을 두루 갖춘 자연과학이론이지만, 이에 대한 철학적 혹은 세계관적 해석은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물론, 양자역학이 다루는 대상이 극히 미시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환경과 아주 다르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런 미시세계에서 비롯된 반성적 사유가 우리 삶의 공간인 거시세계와 크게 연관되기도 한다. 우리는 보통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거의 느끼지 못하는 무상(無常)을 죽음이라는 삶의 특수한 체험을 통해 느끼지만, 이 죽음에서 비롯된 무상이라는 반성적 사유는 결국 일체가 예외 없이 무상하다는 보편적 사유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보어에서 시작된 양자역학이 암시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양자역학은 우리가 지니는 세계관에 대해 여러 면에서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 글에서는 중첩과 측정, 얽힘 상태, 이중성과 상보성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받아
양자계의 특이한 점은 거의 대부분 양자상태가 중첩상태이기 때문이다. a와 b라는 두 가지의 가능한 상태가 있다면 a와 b의 중첩상태도 또한 가능한 상태라는 것이 중첩의 원리인데, 이는 양자역학의 기본 가설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상태와 식당에서 밥 먹는 상태가 가능하다면 이 두 상태가 겹쳐져 있는 상태도 가능하다는 것인데, 거시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양자계를 기술하는 양자상태는 언제나 중첩상태다.
중첩상태에 대해 측정을 하면 그 중의 어느 한 상태로 측정결과가 나타난다. 타석에 선 야구선수의 상태는 범타와 1, 2, 3루타, 홈런의 모든 가능성을 지니는 중첩상태지만 공을 치고 난 상태는 그 중의 어느 하나가 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이는 측정이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 도모나가는 양자계를, 누가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서 행동이 달라지는 수줍은 처녀와 같다고 했다. 은행잔고를 알려고 하는 바로 그 행동 때문에 은행잔고가 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측정에 의해 측정 대상이 변한다는 일은 일상의 이상적인 측정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보어가 속한 코펜하겐 학파는 측정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양자역학은 측정결과의 확률만을 알려주며 이것만으로도 양자이론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양자계는 근본적으로 확률론적이라는 입장이다. 보어와 달리, 물리이론이 확률적이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인슈타인은 보어와 생각을 달리 했고, 유명한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보지 않는 순간에도 달이 떠 있듯이, 사물은 관찰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신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아인슈타인의 실재성(實在性, Reality)이라고 하는데, 물리이론은 마땅히 이러한 실재성을 완벽하게 드러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양자역학은 불완전한(incomplete)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Einstein, Podolsky, Rosen 세 사람은 논문(EPR논문)으로 발표했으며, 이는 아마 물리학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논문일 것이다. 이 논문에서 사용한 양자상태를 ‘EPR 상태’ 은 ‘얽힌(entangled)상태’라고 한다.
이론 물리학자 벨은 1965년에 아인슈타인의 실재성이 옳다면 자연현상이 만족해야 하는 부등식, 벨의 부등식을 만들어 냈다. 이에 대한 정교한 실험적 확인은 1982년에 이루어졌으며, 이 실험에 의하면 벨의 부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실험결과는 양자역학이 예측하는 것과 일치하였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믿었고 우리의 상식과도 일치하는 실재성이 옳지 않으며, 양자계의 측정 결과는 측정 대상 자체의 속성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강한 상호 연관의 망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는 자신의 변화하지 않는 자성(自性)을 지니는 독립된 실체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이라는 연기의 망 속에서 형성되는 전체라는 것을 엿보게 해 주는 대목이다.
양자계의 특성 중 주목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二重性, duality)이다. 이중성이란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보이기도 하듯이, 모든 물체가 파동성과 입자성의 두 가지를 모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고전역학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어서, 이런 현상은 양자역학의 기초를 만들었던 물리학자들을 당혹케 하였다. 양자역학의 기초를 구축하려 했던 보어는 모든 물체는 입자성을 더 보일 수도 있고 파동성을 더 보일 수도 있으며 이 두 성질이 서로 보완적이라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을 제시하면서 이를 우주의 기본적인 성질이라고 보았다.
“실체 없기에 물리학은 확률적”
이중성은 기본적으로 고전역학에서 빌려온 파동-입자의 개념이 양자계를 기술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개념이 사물을 기술하는 데에 부적합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와 개념이 사물을 기술하는 데 적절치 않다면, 언어와 개념을 통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할 수 없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시인은 총알로는 순수의 표상인 한 마리의 새를 포획할 수 없다고 노래한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박남수/새) 우리는 언어와 개념의 총알로 포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모르고, 내가 보는 그 모습 그대로의 속성을 사물이 지니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체성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양형진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3호 [2009년 09월 08일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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